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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이야기

넘어감의 은혜 - 차선의 무기와 최선의 무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8. 29.

"언어를 구사할 때도 어머니의 언어 법을 닮으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위독한 상황에서 아픔을 표현할 때, "수녀, 내 몸이 왜 이렇게 안정적이지 못할까?" 라는 말을 하셨어요. 품위도 있고 보채지 않는, 남한테 불안감을 부르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불편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었는데도, "빨리 죽어야지" 이렇게 푸념하지 않으시고 "글쎄,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나, 모든 것이 원죄의 결과라면 결과랄까?" 그러면서 넘어가셨어요. "누가 어떻고 어땠다"라는 말을 생략하십니다. 젊어서도 제가 누구에 대해 불평하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 하셔서, 그 어법을 닮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이해인-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과 신앙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어머니는 병상에서조차 아픔을 토로하며 불안과 원망을 쏟아내지 않으셨습니다. “
내 몸이 왜 이렇게 안정적이지 못할까?”라며 차분히 아픔을 묻고, 관계의 갈등 속에서도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나, 모든 것이 원죄의 결과라면 결과랄까?”라고 담담히 넘어가셨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직접적인 비난 대신, 인간 모두가 짊어진 연약함의 차원에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 언어 속에는 품위와 자비가 배어 있었고, 불필요한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사랑의 지혜가 담겨 있었습니다.

신앙은 결국 이런 태도의 언어로 드러납니다. 어린 시절 이해인 수녀가 불평을 늘어놓으면, 어머니는 “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나 체념이 아니라, 넘어감의 영성을 가르치는 지혜였습니다.

성경에서 유월절이 바로 그런 은혜의 사건입니다. “
유월”이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갔습니다. 그 집안의 의로움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옳음이나 분별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라는 표적입니다.

신학자 바르트는 선악의 분별은 결코 최선의 무기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필요할 때 쓰는 차선의 무기에 불과합니다. 진짜 최선의 무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에 대한 신뢰, 곧 복음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능력’이 신앙의 완성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선악의 분별로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관계의 갈등도, 인간의 죄성도, 내 안의 어둠도 결국은 비판과 분별만으로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바라보는 믿음, 복음의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
그냥 넘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옳고 정당해 보이는 말이라도 던지면 불필요한 상처와 불안을 남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차선의 무기인 비판을 휘두르지 않고, 최선의 무기인 복음을 붙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힘, 곧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의연함입니다.

성철 스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가장 큰 공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단순한 인내심이나 인간의 도덕적 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를 뒤집어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만 열리는 길입니다. 자기 연민이나 자기 의에 함몰되지 않고 살아가는 힘은 오직 복음에서만 나옵니다.

우리 역시 돌아보니, 젊은 시절에는 비판과 혼돈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분별하고 따지는 것을 신앙의 성숙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차선을 최선으로 착각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
나쁜 습관을 고치려 하기보다는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라”는 말씀을 붙들면서, 점차 차선을 넘어 복음이라는 최선으로 발걸음을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좋은 습관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복음에 뿌리내린 태도입니다. 비난보다는 품위 있는 언어를 선택하는 습관, 분별보다는 그리스도의 피를 붙드는 습관, 차선이 아니라 최선에 의지하는 습관 말입니다.

유월절의 은혜는 오늘도 우리를 부릅니다. 비판과 분별에 머무는 차선의 무기가 아니라, 어린 양의 피에 의지하는 최선의 무기로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넘어감의 은혜 안에 사는 것, 그것이 진짜 신앙의 품위이자, 복음의 길입니다.

신앙의 언어와 태도는 ‘
넘어감의 은혜’를 담아야 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넘어가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향해 넘어가는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차선을 넘는 최선의 길이며, 복음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