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복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제자들이 재판장에 끌려온 것입니다. 그들을 재판한 이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산헤드린 공회, 곧 71명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최고 권력기관이었습니다. 이곳은 입법·재판·종교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고,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심판하려는 대상은 누구인가? 칼을 든 반역자도 아니고, 폭력을 행사한 범죄자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한 제자들입니다.
산헤드린은 제자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전한 복음이 싫어서 그들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함을 싫어하여...” ‘싫어하여.’ 이 단어는 세상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성도는 종종 이유 없는 미움을 받습니다. 존재 자체가 불편하고, 복음을 말하면 더더욱 미움 받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당하는 공격은 종종 억지입니다. 법적 근거도 필요 없습니다. ‘괜히 싫어서’ 미워하고, ‘말이 안 돼도’ 핍박합니다. 왜냐하면 빛이 어둠을 비출 때, 어둠은 항상 불편해하기 때문입니다.
공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름만 들으면 다 성경적 지도자들입니다. 관원들,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그들의 문중들까지. 그러나 그들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이용한 정치 집단, 정확히 말하면 권력 유지 기구였습니다.
특히 대제사장 가문은 더 심각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사독 계열이 맡아야 했지만, 헤스모니아 왕조가 정치적 이유로 대제사장을 세우면서 종교권력은 철저히 세속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생겨난 종파가 사두개인입니다.
사두개인의 특징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영혼도 천사도 믿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권력·부·지위만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들에게 대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배계층으로 남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을 극도로 미워했습니다. 부활은 자신의 세계관을 뒤엎는 메시지였고, 부활은 자신들의 종교 권력을 무너뜨리는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또 놀라운 사실 하나는, 산헤드린에는 바리세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둘은 원래 절대 섞일 수 없는 적대 관계였습니다. 바리세인은 천사·영혼·부활을 믿는 보수 신앙입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은 부활·영혼 부정, 철저히 현실 정치 중심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이 연합합니다. 왜? 공통의 적, 예수와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복음을 막기 위해 원수끼리도 손을 잡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그렇습니다. 서로 싸우던 세력들이 갑자기 힘을 합쳐 교회를 공격하고, 평소에 욕하던 사람들이 함께 성도를 비난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공격받으며, 복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어둠은 연합합니다.
그런 산헤드린 앞에 베드로가 어떻게 섰는가?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그 앞에는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력자 71명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복음을 선포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느니라.”(4:10)
그리고 베드로는 구약의 핵심 예언을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4:11) 마침내 그는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단언합니다.“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 이 세상을 움직이는 이름이 많습니다. 권력의 이름, 철학의 이름, 돈의 이름, 명예의 이름… 하지만 구원하는 이름은 단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미움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이 사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받으려 애쓰지 마십시오. 미움 받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증거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종교이든 정치이든, 사람의 권력이 강해지면 십자가는 항상 거슬립니다.
복음은 어떤 지성과 철학으로도 꿰뚫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표적 추구도, 헬라인의 철학적 사고도 복음을 붙잡지 못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힘, 인간의 지성, 인간의 성공과 충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성도는 모든 어둠 앞에서 담대해집니다.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바꿉니다. 도망하던 사람을, 생명을 걸고 증언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한 가지 고백으로 귀결됩니다. “예수 외에는 없다.” 세상은 다른 길을 내세우고, 다른 이름을 높이고, 다른 능력을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름은 오직 하나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복음을 대적하지만, 복음은 꺾이지 않습니다. 산헤드린은 복음을 없애려 했지만 그날 베드로의 선포는 오히려 복음의 빛을 예루살렘 전체에 퍼뜨렸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복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미움은 복음을 소멸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이 살리신 이름”, 하늘에서 주신 유일한 구원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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