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6~19)
사람의 몸은 상처를 입으면 피가 나고, 시간이 지나면 흉터가 남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상처는 보이지 않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더 오래, 더 깊이 남습니다. 어린 시절의 외로움, 버림받은 기억, 부당한 대우, 혹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감정 하나가 수십 년을 지나도 우리 안에서 여전히 피를 흘립니다.
겉으로는 멀쩡히 웃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어떤 ‘시간’이 멈춰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멈춘 시간은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나는 잘못된 존재야”라고 속삭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종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 하나님은 메시아의 사명을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실 때, 이렇게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예수님은 ‘마음의 상한 자’를 ‘눈먼 자’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문학적 변화가 아니라, 깊은 영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하면, 영적인 눈이 어두워집니다. 상처는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 인생에 어떤 뜻이 있는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내적 치유란 바로 이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는 것입니다. 상처로 인해 어두워진 영혼의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다시 보는 회복의 순간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말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의 장벽을 넘으시는 주님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과거 속에 계십니다. 어제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능력은 오늘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상처, 기억 속에서 봉인된 고통조차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순간들을 다시 찾아가 “그때도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깨달음이 바로 내적 치유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통해 버림받았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되는 것, 그것이 치유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고백처럼, 그는 8세에 아버지를 잃고 20세까지의 12년을 ‘잃어버린 어둠의 시간’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12년의 공허함을 보상해 주세요.” 그러던 중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 말씀을 묵상하던 어느 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아셨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어두운 시간에도 그분은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지난 12년의 시간 속으로 주님의 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치유란 과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 속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배 중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환상이 떠올라 괴로워했습니다. 그것은 13살 때 당한 끔찍한 폭행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가해자를 용서했지만, 더 깊은 곳에는 또 다른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사건을 털어놓았을 때 어머니가 “네 머리카락 때문에 그랬다”라고 말하며 그녀의 머리를 잘라버렸던 그 장면....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남성’과 ‘사랑’이라는 이미지가 완전히 뒤섞여 있었습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동시에 두려움의 상징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녀의 목사님은 그 상처를 ‘분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는 도시락에 방울토마토와 손편지를 넣어 딸에게 보냈습니다. 그녀가 토마토를 집으며 편지를 읽던 순간, 성령께서 임하셨고, 그녀는 오열하며 울었습니다.
그 눈물 속에서 오랜 시간 얼어 있던 감정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고, 그날 이후 그녀는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더 이상 환상 속의 괴로움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는 치유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회복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분은 저주와 조롱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가장 깊은 인간의 상처, ‘버림받음’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상처가 우리의 치유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상처를 지닌 채 부활하셨습니다. 손과 옆구리에 난 못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완벽히 치유된 몸으로 부활하셨지만, 그 상처를 남겨두셨습니다.
왜일까요? 그 상처를 통해 우리가 위로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를 끌어안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여기 있다.”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내적 치유는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의 나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그 순간, 당신의 눈이 열립니다.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고, 그분의 사랑이 그 어둠 속에서도 일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동일하신 주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당신이 잊었다고 생각했던 상처, 의식조차 닿지 못하는 마음의 골짜기까지도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고치리라.”
당신의 상처를 감추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서 그것을 꺼내 놓으십시오. 숨김 없는 고백은 치유의 첫걸음입니다. 과거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이 울던 그 자리에서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성령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치유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일으키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서십시오. 치유받은 당신의 삶이 또 다른 누군가의 회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남아 있는 오래된 상처들을 당신의 사랑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옵소서. 제가 그때의 나를 용서하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도 주님이 함께하셨음을 믿게 하옵소서. 오늘 이 순간, 당신의 성령으로 제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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