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의 밤은 늘 거룩과 광기가 뒤섞여 있었슥니다. 낮에는 성전의 제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밤이 되면 그 거룩함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속삭임이 오갔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가 주도한 비밀 모의는 단순한 정치적 음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신앙의 폭력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단순한 이단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지켜 온 세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존재였습니다. 할례, 율법,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편이다”라는 확신까지도 위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제거하는 일은 개인적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의무로 포장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기존 질서를 흔들 때, 특히 “하나님의 뜻”이라는 언어를 새롭게 해석할 때, 가장 먼저 분노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신앙의 중심부에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입니다.
바울의 가장 큰 죄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이미 수많은 이방 개종자들을 받아들여 왔습니다. 문제는 바울이 아무 조건 없이, 할례도, 율법의 멍에도 없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렀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 한 사람이나, 어제 처음 교회 문을 연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듣기에는 은혜로운 말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지금까지 쌓아 온 경력, 헌신, 열심이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의 신앙 자존심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복음이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열심당원조차 베드로를 쉽게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역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상징이었고, 여전히 ‘우리 편’처럼 보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통제를 벗어난 사람이었고, 로마 세계를 무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차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같은 말을 해도, 내부 인물이 하면 “조금 과한 표현”이 되고, 외부 인물이 하면 “위험한 사상”이 됩니다. 베드로는 아직 관리 가능한 인물이었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열심당원의 발언은 차갑고 계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매달 명단을 만들고, ‘기도’라는 이름으로 살해 대상을 선정합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회개가 아니라 정당화의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라는 말은 칼을 쥔 손을 떨리지 않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마취제였습니다. 이 장면은 종교적 극단주의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목적은 거룩합니다. 수단은 폭력입니다. 결과는 언제나 피입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다른 형태의 ‘명단’을 만듭니다. 저 사람은 진짜 신자가 아닙니다. 저 설교는 위험합니다. 저 교회는 복음을 왜곡합니다. 칼 대신 말과 여론을 사용하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는 바울을 추적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의 일은 늘 그들의 계산을 벗어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디모데를 만납니다. 아직 젊고,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 애매한 청년은 훗날 복음의 핵심 동역자가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울을 막으려는 자들의 열심은 복음을 더 널리 퍼지게 만드는 배경이 됩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복음은 더 멀리 이동했고, 사람들의 생애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마치 불이 바람을 만나 더 크게 타오르듯,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방해 속에서 오히려 확장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나쁜 유대인 vs 좋은 사도”의 구도가 아닙니다. 이 서사는 나는 바울인가, 블라스티니우스인가? 은혜가 나의 질서를 무너뜨릴 때, 나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제거하려 하는가? 내가 지키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나의 신앙 체계인가? 복음은 언제나 기존의 종교성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은 늘 위험합니다.
바울이 위험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 철저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비밀 모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정신은 지금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갈라디아로 향하는 바울의 발걸음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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