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안양의 한 아동일시보호소, 그곳은 세상의 가장 아픈 사연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누군가는 가족에게 버려지고, 누군가는 폭력에 시달리며, 누군가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름조차 없이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동시에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 하나님이 여전히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말씀하시는 사랑의 최전선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명, 그러나 상처로 시작된 삶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한 공무원이 모텔에서 발견된 갓난아기를 안고 보호소 문을 두드립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아이는 이름도, 가족도 없이 도시 이름을 따서 ‘안씨’라는 성으로 불리게 됩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야 할 그 작은 몸은 차가운 공기와 낯선 손에 맡겨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아이를 품고 계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하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노라."(예레미야 1:5) 아이의 시작은 상처이지만, 그 생명의 존재 자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세상이 버렸어도, 하늘 아버지는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7살 소연이는 아빠 손을 잡고 보호소 문을 들어섭니다. 아이는 여전히 아빠가 다시 데리러 올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문이 닫히고 아빠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그 작은 얼굴에는 불안이 스며듭니다. 이별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사랑이 끊어진다는 두려움은 본능으로 느껴집니다. 선생님은 말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와의 단절을 ‘한쪽을 포기하는 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잃거나 버려질 때, 그 아픔을 ‘단절’로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단절의 자리에서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보호소 별님반의 어린아이들은 약을 먹는 시간마다 서로 먼저 먹으려 다툽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약을 먹는 그 순간, 선생님이 자신에게 집중해주는 그 ‘관심’을 사랑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싶은 갈망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사랑은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생존의 신호입니다. 그 작은 몸짓 속에는 “나를 봐주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라는 울음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멀리서만 바라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아픔 속으로 직접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 사랑은 말이 아니라 ‘찾아가는 일’입니다. 보호소의 선생님들이 아이 곁에 머무는 것처럼, 하나님은 상처받은 우리 곁에서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반복적인 학대로 두개골에 금이 간 대동이의 MRI 결과를 기다리던 선생님들은 가슴을 졸였습니다. 다행히 뇌 손상은 심하지 않았고, 대동이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는 보고에 모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아이가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건 회복의 시작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하실 때도 그렇습니다. 회복은 한순간의 기적이 아니라, 눈물과 인내 속에서 조금씩 피어나는 은혜입니다. 떼를 쓰는 대동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울고, 분노하고, 때로는 원망할 때조차 그분은 우리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 눈물조차도 회복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4)
한 아빠가 두 남매를 보호소에 데려오며 말합니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빠가 돈 벌어서 꼭 데리러 올게.” 아이들이 들고 온 낡은 종이 상자 안에는 부서진 인형, 낡은 사진, 그리고 집의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아직 집이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보호소 같은 세상 속에서 기다리지만, 언젠가 영원한 집,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날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한복음 14:2)
보호소에서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100일 남짓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고, 상처 속에서도 인간으로 다시 서는 법을 배웁니다. 보호소의 선생님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지만, 사랑을 심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지 않지만, 존재를 지켜주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단번에 없애시지 않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붙드십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이름 없이 버려지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단 한 사람도 우연히 태어난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기억되고, 불리며, 사랑받습니다. 안양의 보호소에서 울고 웃는 아이들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보호받는 존재입니다. 잠시 세상에 던져진 듯 보여도, 그분의 손 안에서는 결코 잃어버려지지 않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주님, 버려진 듯 보이는 생명 하나하나가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사랑의 품을 허락하시고, 그들을 돌보는 손길에도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소서. 이 땅의 모든 보호소가, 주님의 사랑이 흐르는 작은 천국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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