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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으로

디도의 일기(06) - 죽음의 맹세 앞에 선 복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1.

바울은 이미 수없이 위협을 받아 왔습니다. 돌에 맞았고, 쫓겨났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누가의 입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그 모든 위험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이제 적은 우발적 폭도가 아니라, 신학적 확신과 종교적 열심으로 무장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의
‘죽음의 맹세’는 단순한 살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 자체를 겨냥한 맹세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죽이겠다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이 세운 모든 것을 무너뜨리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그는 ‘다른 복음’을 들고 뒤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그 교회를 안에서부터 갈라놓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한 선교사가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해 공동체를 세우면, 그 뒤를 쫓아가
“예수는 좋지만, 이것도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는 시작일 뿐입니다. 완성은 당신의 순종입니다.”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증명하세요.” 블라스티니우스는 예수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혜를 부정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열심 있는 신앙인’입니다. 누가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디모데의 얼굴은 굳어 갔습니다. 젊은 디모데에게 이 이야기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이 적은 무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정통했고, 언변이 뛰어났으며, 리더십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께 맹세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설마 저렇게까지 하겠어?”

그러나 교회사에서 가장 잔혹한 박해는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서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스데반을 돌로 친 자들도, 모두 하나님을 위한다고 믿었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는 바로 그 계보 위에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여행의 고단함도, 갈등도,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심이 은혜를 밀어낼 때 벌어지는 비극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의 반응입니다. 분노도, 두려움도, 과장된 영웅적 결의도 없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맹세하고 덤벼드는 적, 성경에 해박한 전문가, 열성분자 중의 열성분자… 그뿐인가?” 바울은 이미 복음의 길은 언제나 이런 적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복음은 사람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 왔던 모든 종교적 자산을 한순간에 무가치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죽은 사람에게는 협박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생명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죽음의 맹세’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는 돈, 재정, 이동 경비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늘의 문제이지만, 사도들은 늘 땅의 문제를 안고 움직였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내세워 교회에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의 말을 팔아 여행 경비를 마련하자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또 다른 싸움을 봅니다. 그는 블라스티니우스와 싸우기 전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고 있습니다. “여행 경비는 천사가 대주겠지.” 이 말은 농담 같지만, 오늘날 교회에도 익숙한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믿되, 책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기적을 기대하면서도 말을 팔 줄 아는 사람입니다. 드로아를 떠나며 배에 오르기 전, 바울은 드로아를 돌아봅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예고하는 듯합니다.
“언젠가 너에게 다시 돌아오마.” 그리고 실제로 바울은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자유로운 선교사가 아니라, 죽음을 앞둔 죄수였습니다.

그때 바울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바로 디도였습니다. 복음의 길은 이렇게 아이러니합니다. 오늘의 항구는 안식처럼 보이지만, 내일은 감옥이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블라스티니우스의 맹세는
“끝까지 쫓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보다 더 오래된 맹세 위에 서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바울은 그 맹세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배에 오릅니다. 죽음의 맹세 앞에서도 복음은 멈추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