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은 흔히 “담대한 사도”, “불같은 전도자”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드로아의 바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웅적인 사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고, 머물러야 할지 떠나야 할지를 두고 깊은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드로아의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아 호머의 시를 읊조리는 바울의 모습은 어쩌면 낯설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은 바울이 얼마나 깊이 인간의 역사와 문화, 사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듬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헬라인의 언어와 노래를 알고 있었고, 그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과 통찰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정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곳이 좋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거지?” 이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기가 안정적이다.” “이 길이 현실적이다.”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늘 사람들의 계산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음 날을 금식으로 정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어떤 종교적 열심의 과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오히려 현실적인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여비가 부족하고,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면서도 그는 말합니다. “지금은 무엇을 결정할 때가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야 할 때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금식은 하나님의 뜻을 ‘끌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금식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 판단을 내려놓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은 금식을 일종의 영적 압박 수단처럼 사용합니다.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금식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다릴 뿐입니다.
이야기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울은 환상에 의존하는 리더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대부분 성령의 내적 인도, 상황에 대한 분별, 복음의 필요성에 근거해 사역을 결정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환상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기다렸을 때, 반드시 필요한 만큼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언제나 사명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 환상으로 인해 복음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로마로 이어지는 복음의 대서사는 바로 이 드로아의 밤에서 시작됩니다.
환상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를 보내십니다. 누가는 편지를 들고, 말을 타고,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을 찾아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인도가 단선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환상으로 방향을 주시고 항구라는 지리적 조건을 준비하시고 정확한 시점에 누가를 보내어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맞물려 하나님의 뜻은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의 확신으로 굳어집니다. 오늘날 많은 혼란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개인의 감동은 있지만, 공동체의 확인은 없습니다. 확신은 있지만, 책임질 증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에는 언제나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가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늘 ‘지금 여기’에서 열립니다. 드로아는 바울이 계획한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임시로 머문 항구였습니다. 망설임의 공간이었습니다. 불확실함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십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애매하다고 느끼는 시간,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순간,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때가 하나님의 뜻이 가장 깊이 준비되고 있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다렸고, 바울은 내려놓았고, 바울은 결국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바다를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즉각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모호한 채로 남겨지지도 않습니다. 기다림 끝에, 순종할 수 있을 만큼만, 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드로아의 밤은 이렇게 오늘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결정하려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은 서두르는 자에게가 아니라, 기다릴 줄 아는 자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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