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우리를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사도행전 16:14~15)
복음은 언제나 예상 밖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웅장한 회당도, 준비된 강단도 아닌, 한 여인의 집 거실에서 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던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여긴 정말 루스드라하고는 딴판이네요.” 그 말 속에는 낯섦과 긴장, 그리고 어쩌면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감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루스드라는 소박한 시골 도시였습니다. 더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보는 달랐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계층이 분명하고 질서가 엄격한 도시입니다. 그런 곳에서 루디아의 집 거실에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부유한 상인, 장터의 장사꾼, 집안의 하인과 노예, 가난한 이들까지 모든 계층이 한 공간에 모여 있었습니다. 관례에 따라 신분별로 자리를 나누어 앉았지만, 그날은 그 질서가 마지막으로 지켜진 날이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사회의 경계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길 위에서 나를 만나셨습니다.” 바울은 화려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웅변가처럼 군중을 휘어잡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만난 예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자기 확신과 열심으로 가득 찼던 그 길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무너졌던 순간입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그분 앞에서 완전히 틀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간증은 늘 그랬습니다. 자기 의를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붕괴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 다음 모임에도 다시 찾아왔습니다. 장사가 끊긴 이도 있었고, 사회적 손해를 감수해야 했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위로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을 송두리째 바꾸는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몇 주가 지나자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는 관용적인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주’와 새로운 ‘왕’을 선포하는 이들은 언제나 불온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님을 믿기로 작정한 이들 가운데 단 한 명도 모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이때 무너집니다. 열심은 사라지고, 믿음은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처음부터 교회가 ‘사도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늘 말했습니다. “우리가 없어도, 서로를 돌보며 모임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태생부터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였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모임은 단조롭지 않았습니다. 실라는 노래를 가르쳤고, 디모데는 곁에서 도왔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울려 퍼지는 찬송은 거창하지 않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질문이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스인답게, 이들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왜 십자가여야 합니까?”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까?” “율법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습니까?” 바울은 그 질문들을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믿음은 침묵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부딪힘 속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중심에는 루디아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날, 바울과 일행을 집으로 들이던 장면은 웃음 섞인 에피소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루디아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게 말이 됩니까?” 그 말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만들어내는 관계인 것입니다. 사도가 이기고 성도가 지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띠는 느슨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말로만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았고, 함께 울었고, 함께 책임졌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모임은 많지만, 서로의 삶은 모르는 건 아닐까요. 설교는 넘치지만, 함께 짐을 지는 일에는 인색하지는 않습니까. 빌립보 에클레시아는 한 여인의 집에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서야 하는지를 지금도 또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여전히, 사람의 집에서 사람의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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