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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으로

디도의 일기(13) - 소동을 원치 않았던 사도,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소동을 일으킨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들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사도행전 16:18~19)

바울은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군중을 모으는 데 관심이 없었고,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는 욕망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선교는 늘 조용했습니다. 그는 시장 한복판이 아니라, 기도처에서 몇 사람과 마주 앉아 복음을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천막을 꿰매며 생계를 잇고, 틈이 나면 예수를 전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도였습니다.

빌립보에서 일어난 사건도 그랬습니다. 그날의 시작은 너무도 평범했습니다. 매일같이 따라다니며 비명을 질러 대던 노예 소녀, 델피에서 왔다는 그 아이는
‘점치는 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비명을 신탁으로 여겼고, 주인들은 그 소리를 돈으로 바꾸었습니다. 아이의 고통은 누구도 보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수익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비명이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한 생명이 보내는 구조 신호로 들려왔습니다. 그는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 주인에게 돌아가거라.” 이 말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퇴짜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 광기의 무대에 서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멈추지 못했습니다. 광기는 의지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바울은 분노했습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영, 한 아이의 인생을 상품으로 만드는 체계, 고통을 이용해 돈을 버는 구조에 대해 그는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아이에게서 당장 나가지 못할까!” 이 명령은 아이를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붙잡고 있던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향한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변화는 즉각적이었습니다. 비명이 멎었습니다. 몸이 굳어졌습니다. 떨림이 왔습니다. 아이는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며
‘소동’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그것은 해방의 진통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치유를 아름답게만 상상합니다. 잔잔한 음악, 눈물 한 방울, 고요한 회복, 그러나 성경 속 치유는 자주 그렇지 않습니다. 해방은 때로 몸부림이고, 비명이고, 쓰러짐입니다. 쇠사슬이 끊어질 때는 언제나 소리가 납니다.

문제는 귀신이 아니라 돈이었습니다. 아이의 주인들은 즉시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신통력이 사라진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는
‘신의 대변자’였고, 오늘은 ‘평범한 계집애’였습니다. 주인들의 분노는 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급격히 방향을 틉니다. 치유는 개인의 문제가 끝나는 순간이 아니라, 기득권의 문제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군중을 선동했습니다.
“유대인 때문이다.” “외국 신 때문이다.” “로마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역사는 늘 이렇게 반복됩니다. 예컨대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약자의 목소리를 회복시키면, 누군가는 이익을 잃게 됩니다. 착취 구조를 건드리면, 반드시 저항이 따릅니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은 가려지고, 대신 다른 구호가 등장합니다.
“질서!” “안보!” “전통!” “법!” 빌립보의 시장에서 울려 퍼진 “유대인!”이라는 외침은 단지 인종 혐오의 문제가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덮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의 반응입니다. 그는 남지 않았습니다.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군중을 설득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비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이 싸움은 논쟁으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말로 설명되기 전에, 삶의 질서를 먼저 뒤흔듭니다. 바울은 방으로 돌아가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로마로 가고 싶었던 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열망, 그러나 현실은 빌립보의 감옥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의 인간적인 얼굴을 봅니다. 믿음의 거인이 아니라, 좌절하는 한 사람을 말입니다.
“주님, 정말 로마는 아닌가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사건이 바울을 로마로 데려갑니다. 매 맞음, 투옥, 시민권 주장, 그리고 결국 로마행입니다. 빌립보에서의 ‘우발적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필연의 첫 장면이었습니다.

복음은 조용히 시작되지만, 세상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로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복음이 내 삶의 구조, 내 소비, 내 안락함을 건드릴 때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누군가의 해방이 나의 불편이 될 때, 나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바울은 소동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소동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자유는 반드시 누군가의 권력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시장에서 멈춘 것은 소녀의 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빌립보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도시일 수 없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어 세상을 되돌릴 수 없게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