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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으로

디도의 일기(15) - 빌립보 감옥에서 배운 구원의 방식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니라.”(사도행전 16:25,31)

빌립보 감옥의 밤은 고요하지 않았습니다. 채찍에 맞아 살점이 갈라진 몸, 차꼬에 묶인 발,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그 어둠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설명도 아니라, 찬송이었습니다. 사실 이 장면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맞았고, 억울했고, 불법 체포였고, 굳이 참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노래였을까요?

흔들린 것은 감옥이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지진은 감옥을 흔들었습니다. 벽은 갈라지고, 문은 열리고, 쇠사슬은 풀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탈옥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문이 열렸는데도, 아무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문이 열리면 나가야 합니다. 기회가 오면 붙잡아야 합니다. 억울하면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문이 열렸을 때, 너는 어디로 나가고 싶은가?” 우리도 비슷한 순간을 삽니다. 관계의 문이 열릴 때, 편법의 문이 열릴 때, 책임에서 빠져나갈 문이 열릴 때,
그때 우리는
“이게 옳은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나한테 유리한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자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수의 질문은 생존이 아니라 존재의 질문이었습니다. 지진보다 더 크게 흔들린 사람은 간수였습니다. 그는 칼을 들고 뛰어들어 왔습니다. 문이 열려 있고, 죄수들이 보이지 않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나는 끝났다.” 로마 사회에서 간수의 책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죄수가 도망치면, 간수가 대신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망치는 치욕보다, 스스로 죽는 명예를 선택했습니다. 그때 바울의 외침이 어둠을 찢었습니다.
“그러지 마시오!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소!” 이 한마디가 간수의 인생을 뒤집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이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묻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제가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종교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천국 가려면 뭘 해야 합니까?”가 아닙니다.

그의 질문은 훨씬 더 진지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무너졌는데 명예도, 법도, 충성도 나를 살려주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 말은 조건이 아닙니다. 노력의 목록도 아닙니다. 새로운 중심을 제시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구원은 삶의 질서가 뒤집히는 사건입니다. 간수는 즉시 행동합니다. 상처를 씻기고, 기름을 바르고, 집으로 초대합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폭력을 집행하던 자였습니다. 이제 그는 상처를 돌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원은 감정 변화가 아닙니다. 구원은 관계의 방향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명령하던 사람이 섬기게 되고, 통제하던 사람이 초대하게 되고, 지키던 체제가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날 밤, 온 가족이 세례를 받습니다. 이건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닙니다. 집안의 중심이 바뀐 사건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성과가 아니라 은혜가 중심이 되고 성공이 아니라 진실이 기준이 되고 체면이 아니라 생명이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력을 쓰지 않고, 증인들을 세우십니다. 다음 날, 행정관들은 벌벌 떱니다. 지진 때문만이 아닙니다. 루디아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의 권리, 행정관의 직무유기, 법이 어겨졌다는 사실, 루디아는 믿음으로 분노했고, 지혜로 압박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행정관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깨어 있는 성도 한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은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정확히 직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기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진은 멈췄고, 사건은 정리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억울한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부르는가?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내 삶의 한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는가? 빌립보 감옥에서 배운 구원은 이것입니다. 구원은 상황이 바뀌는 게 아니라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갇혀 있었지만 자유로웠고, 간수는 자유로웠지만 묶여 있었으며, 그 밤이 지나고 나서야 누가 진짜 자유인인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조용히 다가옵니다.
“지금 너는 무엇에 묶여 있는가?” 그리고 이어서 들려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