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16:25,40,20:24)
어떤 지도자는 강단에서 내려올 때 박수를 받습니다. 또 어떤 지도자는 감옥에서 나올 때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은 등이 아직 아물지도 않은 채, 그는 루디아의 집 거실 벽에 기대어 앉으려다 이내 몸을 앞으로 숙였습니다. 상처가 벽에 닿는 순간 전해지는 통증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첫 마디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발 절 안지 마세요!" 그 말에 방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분위기는 풀렸고, 바울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난을 겪은 사람이 그 고난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가 자신의 상흔을 먼저 꺼내 보이듯,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그 아찔했던 순간을 반복해서 회상하듯,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날 밤 내내 전날 벌어진 사건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채찍질도, 감옥도, 지진도, 기적 같은 탈출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이 모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사람들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이것은 단순한 강인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의 방향 전환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할 관심을, 의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리는 행위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내륙을 탐험하는 내내 말라리아와 이질로 시달렸지만, 그의 일기에는 자신의 증세보다 눈앞의 강물 줄기와 부족들의 생활상이 훨씬 더 많이 적혀 있었습니다. 관심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그날 밤 모임에서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셋이 기억하는 성경 구절을 다 적어 보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계산을 마치고 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의외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보다 성경에 기댈 가능성은 높지 않겠군."
이것은 성경을 경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진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루마리 하나 없는 빌립보의 새 성도들에게 율법 조문을 외우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바울이 원한 것은 조문을 아는 성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바울의 목회 철학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공동체가 시작되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제도를 세우기 전에 관계를 심으려 했습니다. 모임의 규칙을 정하기 전에 모임의 중심을 가리키려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조직이 이 순서를 거꾸로 밟습니다. 매뉴얼이 먼저 완성되고, 사람은 나중에 채워집니다. 규정이 먼저 틀을 짜고, 관계는 그 안에서 겨우 숨을 쉽니다. 바울의 빌립보 공동체는 그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탄생했습니다. 그것이 훗날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른 어느 교회에게도 쓰지 않은 어조로, "내가 여러분 모두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그리워한다"고 쓸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날 밤 디모데는 실라에게 속삭였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에 관한 이야기도 하실까요?" 하지만 바울은 끝내 그 이름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블라스티니우스는 공동체를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주의적 가르침으로 새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 경고가 분명히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침묵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아마도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위협을 먼저 가르치면 사람들은 위협을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진리를 먼저 가르치면 사람들은 진리를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훈련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짜 지폐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폐의 질감과 무늬를 손끝에 익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짜를 깊이 알수록, 가짜는 스스로 드러납니다. 바울이 그날 밤 선택한 것은 바로 이 방식이었습니다. 경고 대신 진리를, 방어 대신 선포를 말입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관리들이 바울과 실라를 도시 밖으로 내보내려 하자, 누가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작은 가죽 가방이 걸려 있었습니다. 의료도구가 담긴 가방이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채찍을 세 번 맞은 사람이 길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말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가방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막을 수 없는 길이라면, 함께 가는 것, 충고로 안 되면 동행으로, 말로 안 되면 가죽 가방 하나를 어깨에 걸치는 것으로, 바울의 설교가 이 이야기의 심장이라면, 누가의 가죽 가방은 이 이야기의 손발인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이 두 가지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가방을 들고 따라나서는 사람, 빌립보 공동체는 바로 그런 사람들로 시작되었습니다.
채찍 자국이 아직 따가운 밤, 눈물바람 속에 문을 나서며, 바울은 아마 이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심은 것이 씨앗인지 돌멩이인지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심겨진 씨앗은 반드시 자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말에 올라 에그나티아 대로로 접어드는 그의 등 뒤로, 루디아의 집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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