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모데후서 2장 20~26절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오래된 종갓집에는 해마다 큰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날이 되면 할머니는 안방 깊숙한 장롱 위의 찬장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은수저와 놋쟁반, 투박한 질그릇과 나무 주걱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손자들은 늘 궁금해했습니다. "할머니, 왜 어떤 건 상에 올리고 어떤 건 안 올려요?"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그릇이 정하는 게 아니란다. 주인이 정하는 거지." 바울이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런 큰 집이 나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20절).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 먼저 자신을 떠올립니다. '나는 금 그릇일까, 질그릇일까, 어떻게 하면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바울이 말하려던 요점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앞 구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은 누구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터가 단단하다고 해서 그 위에 선 집이 조용하고 깨끗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디모데가 섬기던 에베소교회에는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했고, 그 가르침은 몇몇 성도의 믿음을 뒤집어엎었습니다.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서로 다른 가르침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현실을 그릇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릇 비유는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이사야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사 45:9)라고 경고했고, 우리는 진흙이요 하나님은 토기장이라고도 말합니다(사 64:8, 렘 18:6). 그릇은 자기가 무엇이 될지 정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만드신 분의 몫입니다.
"큰 집"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집은 성전이었고, 그 성전은 십자가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한 몸 된 자들이 성전이라 불립니다(고전 3:16, 엡 2:20~22). 디모데전서 3:15는 이 집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릅니다. 큰 집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려주심을 입은 교회, 곧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금 그릇과 은 그릇은 성막과 성소에서 쓰이던 그릇이었습니다. 법궤와 분향단과 진설병상과 등잔대는 조각목에 금을 입혔고, 향을 담는 그릇은 금으로, 소제물의 고운 가루를 담는 그릇은 은으로 만들었습니다(출 25:11, 25:24, 25:31; 민 7:12 이하, 7:14 이하). 그러나 금이라고 해서 아무 그릇이나 곧바로 성소에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기구와 그릇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출 30:25~29, 40:9~11).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가 오셔서 거룩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성소의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 피의 재앙이 내릴 때 피가 있을 곳으로 말씀하신 것이 "나무 그릇과 돌 그릇"(출 7:19)이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같은 장면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토기장이는 한 덩이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도, 천히 쓸 그릇도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귀히 쓸 그릇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고, 천히 쓸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입니다(롬 9:21~23). 그러므로 금 그릇과 은 그릇은 십자가 안에서 거룩을 이룬 사람들, 곧 진리의 아들이 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다른 교훈을 좇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이 둘이 한 집에 섞여 있는 것이 지상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밭 주인이 좋은 씨를 뿌렸는데 원수가 밤에 가라지를 덧뿌렸습니다. 종들이 "뽑을까요?" 하고 묻자 주인은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셨습니다(마 13:24~30). 팔레스타인의 가라지는 싹이 돋을 때 밀과 거의 구별되지 않아서, 이삭이 팰 때가 되어서야 가려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물 비유도 같습니다. 바다에 던진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함께 걸립니다(마 13:47~50).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모두 '천국 비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는데, 그 안에서 선과 악이 아직 섞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우리의 성실함이나 열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제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많은 설교가 이 구절을 이렇게 읽습니다. 자기를 깨끗이 닦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선행으로 준비하면 하나님이 크게 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신다"는 구호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듣기에는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대로라면 큰 집의 질그릇은 결국 닦는 일에 실패한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릇이 스스로를 금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미 보았듯이 어떤 그릇이 귀하게 쓰일지는 토기장이의 뜻이 정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은 무슨 뜻일까요? 문맥이 답을 줍니다. 19절은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 했고, 20절은 천하게 쓰는 그릇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은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거짓 교사들의 행위와 가르침입니다.
"깨끗하게 하다"로 번역된 '엑카다이로'는 '제거하다, 뽑아내다, 근절하다'라는 뜻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영지주의의 다른 교훈을 뽑아내고 진리를 정결하게 지킨다면, 그 교회는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기"는 개인의 도덕적 자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개인이 자기를 갈고닦는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가 진리를 붙드는 이야기가 됩니다. 집안의 큰 잔치를 앞두고 한 사람이 자기 방만 청소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집 전체가 주인의 뜻에 맞게 서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보면 은혜의 방향이 더 분명해집니다. "거룩하고"로 번역된 '하기아조'는 '구별하다'라는 뜻의 동사인데, 완료 수동태로 쓰였습니다. 구별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구별한 것이 아니라 구별해 주셨고, 그 결과가 지금도 이어집니다. "준비함이 되리라"의 '헤토이마조'도 완료 수동태입니다. 준비가 갖추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준비해서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이미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주인"의 '데스포테스'는 노예와 구별되는 주인,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이 집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쓰심에 합당하며"의 '유크레스토스'는 쓸모 있고 유익하다는 뜻이고, "모든 선한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엡 4:12). 21절을 풀어 쓰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가 거짓 가르침을 뽑아내고 진리를 지킨다면, 이미 거룩하게 구별된 그 교회는 집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선한 일에 유익한 귀한 그릇으로 준비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의 노력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은혜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22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흔히 '청년의 정욕'을 젊은 시절의 성욕이나 혈기로만 읽습니다. 그러나 '에피뒤미아'는 충동과 욕망, 갈망이라는 폭넓은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과 맞세웁니다. 이 넷은 모두 진리와 관련된 표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청년의 정욕은 그 반대, 곧 진리가 아닌 모든 것을 좇는 상태입니다. 성욕이나 식욕, 명예욕을 따로 꼽는 것보다 훨씬 넓은 말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피하고"('퓨고')와 "따르라"('디오코')는 둘 다 현재 명령형입니다. 명령형이라고 하면 우리는 '해야 한다'는 짐으로 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주께서 그렇게 이루어 가신다는 약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은 계속 정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계속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게 하십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 곧 한 믿음과 한 성령 안에서 교회로 세워진 이들과 함께입니다.
길 안내 앱을 떠올려 보십시오. 길을 잘못 들어서면 앱은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며 다시 길을 안내합니다. 운전자를 버리고 가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이 이와 닮았습니다. 우리가 정욕으로 이탈할 때마다 그분은 다시 길로 이끄십니다. 길 위의 사람은 다만 이끌려 가는 사람입니다.
23~24절에서 바울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짓 교사가 눈앞에 있으니 논쟁으로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허탄한 신화와 족보와 율법적 행위를 둘러싼 논쟁(딛 3:9)은 다툼만 키웁니다. "버리라"의 '파라이테오마이'는 '파라'(곁에)와 '아이테오'(구하다)가 합쳐진 말로, '거절하다'라는 뜻입니다. 중간태나 수동태적으로 읽는다면, 진리이신 그리스도 곁에서 구하는 사람은 비진리를 거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비진리를 거절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며"의 '아넥시카코스'는 '견디다'라는 뜻의 '아네코'와 '나쁜, 악한'이라는 뜻의 '카코스'가 합쳐진 말로, 악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논쟁을 거부하고 온유하게 진리를 건네며 잘 가르치는 것, 그것이 곧 악을 견디는 일입니다. 덫에 걸린 짐승을 구해 본 사람은 압니다. 겁에 질린 짐승은 풀어 주려는 손을 물고 할큅니다. 그래도 구하는 사람은 화를 내거나 맞서 싸우지 않고, 물리는 것을 참아 가며 천천히 덫을 풉니다. 이길 생각을 하면 구할 수 없습니다. 온유는 약함이 아니라, 상대가 덫에 걸려 있음을 아는 사람의 인내입니다.
25~26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혹 … 하실까"는 가정법 의문문입니다. '온유함 안에서 계속 복음을 건네다 보면, 하나님께서 혹시 그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 않을까?' 하는 뜻입니다. 확신에 찬 장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결과를 맡기는 겸손한 소망입니다. 결국 회개는 설득의 기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성령께서 건네주시기 때문입니다. "깨어"의 '아나네포'는 '아나'(위를 향하여)와 '네포'(정신을 차리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위를 향해 정신을 차린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마취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마귀의 올무에 매여 있던 이들이 어느 순간 눈을 뜹니다.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의 그릇으로 은혜를 입은 우리도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먼저 깨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직 올무에 매여 있는 이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복음을 건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도 깨우실지 모릅니다.
잔치가 끝나고 할머니가 그릇을 닦아 찬장에 넣는 동안, 손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할머니, 이 은수저는 자기가 은수저인 걸 알까요?" 할머니는 대답했습니다. "알든 모르든, 이 집 주인이 이 그릇으로 상을 차리기로 하셨으면 그걸로 된 거란다." 우리는 큰 집의 그릇입니다. 우리가 금이 되려고 애써서 금이 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구별되었고, 그분의 쓰임을 위한 준비도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다른 교훈이 들어올 때 다툼으로 맞서지 않고 진리를 붙들어 그것을 뽑아내며, 정욕에서 건져 주시는 주님께 이끌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습니다. 그리고 아직 올무에 매인 이들 앞에서는 온유하게 복음을 건네며 하나님께서 그들도 깨우실지 모른다고 소망합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도 그분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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