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모데후서 2장 7~13절
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로마의 지하 감옥, 습기 찬 벽과 쇠사슬 소리가 끊이지 않는 그곳에서 늙은 사도 바울이 붓을 듭니다. 그는 곧 처형될 것을 압니다. 이 편지가 자신의 마지막 유언이 될 것도 압니다. 그런데 이 편지 안에는 원망도, 두려움도, 자기 연민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씁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우리라면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남길까요? 대부분은 "너무 애쓰지 마라", "몸 건강히 지내라" 같은 인간적인 당부를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앞서 말한 병사와 운동선수와 농부의 비유를 다시 한번 곱씹으라고, 그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순한 처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를 담고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 "생각해 보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단순히 머리로 한번 헤아려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에 담아 두고 곱씹고 또 곱씹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마치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한 번 삼킨 풀을 다시 꺼내어 씹고 또 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읽을 때 한 번 훑어보고 "아, 좋은 말씀이다" 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묵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언약의 핵심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그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어떤 성도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성경 구절을 통째로 암송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인생의 위기 앞에서 그 구절들은 아무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에만 있었지 마음에 새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글도 잘 모르셨지만 평생 붙들고 살아온 시편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한 구절이 어머니의 전 생애를 붙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이에오", 즉 마음에 두는 묵상의 힘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놀라운 표현을 씁니다. "나의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어떻게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될 수 있습니까?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바울이 만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깊은 신비가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이 복음이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바울에게 주어졌을 때, 바울은 단지 그 복음을 전달하는 우체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 자신이 복음이 되었습니다. 마치 불에 달궈진 쇠막대기가 불 자체는 아니지만 불의 성질을 온전히 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아들이 되었다면, 그 복음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복음"이 됩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오지에서 사역하며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남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로 복음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복음이 곧 나의 존재 이유, 나의 숨결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나의 복음"의 의미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고백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죄인"이라는 단어는 흥미롭게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달린 두 강도를 가리킬 때 쓰인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흉악범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몰래 편지를 쓸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선언입니다. 바울의 몸이 사슬에 묶여 있어도, 말씀 자체는 그 사슬과 아무 상관없이 스스로 살아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이 있습니다. 20세기 공산 정권 아래에서 성경이 압수되고 불태워지던 시절, 지하 교회 성도들은 손으로 성경 구절을 필사해 나눠 가졌습니다. 정권은 사람을 가두고 책을 태울 수는 있었지만, 한번 마음에 새겨진 말씀, 한번 전파된 복음은 그 어떤 감옥으로도 가둘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게 사람의 마음속으로 파고듭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 모든 고난을 견디는 이유를 밝힙니다.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참음"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아래 머물러 견고하게 서 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인내가 아닙니다. 마치 거센 강물 속에서도 뿌리 깊이 박힌 바위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친히 붙드셔서 흔들리지 않게 세우시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바울이 참고 견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세우신 것입니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 배가 스스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튼튼한 닻이 배를 붙들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노년의 성도가 암 투병 중에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제가 믿음으로 이 병을 이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붙들고 계셔서 제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경험한 "견고하게 세워짐"입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바울은 초대 교회에서 함께 부르던 신앙 고백, 혹은 찬송의 한 구절로 여겨지는 네 가지 선언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이 네 문장은 얼핏 보면 우리의 행동이 조건이 되어 하나님의 반응이 결정되는 것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살 것이요, 우리가 참으면 왕 노릇 할 것이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원어를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납니다. 특히 12절 후반의 "부인하면"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문법상 중간태로 쓰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거부하는 것도, 주님이 우리를 거부하시는 것도 결국 주님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문제가 하늘의 인정과 부인의 문제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절정은 13절 마지막 구절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이 문장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훨씬 더 놀라운 뜻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믿음이 아니지만, 그분은 믿음으로 머물러 계시기에 자신을 거부할 수 없는 분이시다." 여기서 결정적인 통찰이 나옵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의 근원이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제든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했듯, 아무리 굳센 결심을 해도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음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스스로 부정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마치 태양이 자기 자신을 향해 빛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없듯이,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삶으로 보여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믿음의 자리를 지켜온 한 목회자가 은퇴를 앞두고 후배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평생 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깨닫는 것은, 제 믿음이 흔들릴 때조차 저를 붙드신 것은 제 믿음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죽음 앞에서 디모데에게 남긴 마지막 확신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만납니다. 병상에서, 사업의 실패 앞에서, 관계의 깨어짐 속에서 우리는 "내가 정말 믿음이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이것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이 확신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했고, 자신의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견고하심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한번 새겨야 합니다. 우리를 붙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믿음의 견고함이 아니라, 결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그 신실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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