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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디모데전후서

디모데전서 - 하나님의 사람, 도망칠 수 없던 사람이 붙잡힌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24.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디모데전서 6:11~16)

어느 마을에 오랫동안 빚에 시달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빚쟁이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도망 다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다음 날이면 똑같은 자리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발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돈을 사랑했고, 돈이 주는 안전함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도망치라는 명령을 수백 번 들었지만, 스스로는 단 한 걸음도 진짜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모든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가 너를 이 자리에서 데리고 나가겠다. 네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옮기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 이하의 말씀은 바로 이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11절).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흔히 '더 훌륭한 신앙인이 되라'는 격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원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납니다.

"
오직"으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앞의 내용과 대조를 이루는 접속사이며,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감탄사도 함께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러나 오! 당신은 하나님이 된 사람이여!"라는 감격의 외침에 가깝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돈을 위해 다른 교훈을 가르치던 거짓 교사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하나님과 하나 된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 사무엘, 다윗,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이들을 "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그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진리를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말씀이 임하여 그 말씀을 전하는 자,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
하나님의 사람"에 정관사가 붙습니다. 신약에서는 기록된 말씀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정관사조차 없이 이 표현이 쓰입니다. 이는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신적 존재와 연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
이것들을 피하고"라는 명령에서 "피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퓨고'입니다. 도망하다, 탈출하다는 뜻이며,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음행을 피하라",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할 때도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와 탐욕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요?

앞서 이야기한 빚진 사람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그는 도망치라는 말을 듣고 실제로 발로 뛰어다녔지만, 마음은 여전히 돈에 매여 있었기에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인간의 자기 의, 자기 사랑에서 도망치라는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중심성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탈출은 반드시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형은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친히 이끌어 탈출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에서 "따르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코'는 '피하다'(퓨고)의 정반대 단어입니다. 뒤좇다, 추적하다, 어떤 자에게 소속시키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열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는 우리가 노력해서 갖추어야 할 신앙의 덕목 목록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로마서 1장의 "하나님의 의", 사도행전 3장의 "거룩하고 의로운 이", 로마서 3장의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요한일서 4장의 "하나님은 사랑이심", 마태복음 11장의 "온유하고 겸손한 나"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이 말씀은 "
당신이 의롭고 경건하고 사랑스럽고 인내하며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에게 당신을 계속 소속시키시고, 그렇게 완성해 가실 것이다"라는 약속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걸음을 이끄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따라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모가 아이를 계속 자기 곁에 소속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은 말합니다.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여기서도 우리는 흔히 '내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원어의 문법을 보면 "싸우라"와 "취하라"는 중수디포태, 즉 스스로 행하면서 동시에 그 결과를 받는 특별한 형태로 쓰여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된 자, 곧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싸우게 되는 싸움을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백마를 타신 분이 등장합니다. "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충신"은 '믿음'이라는 뜻의 단어이고, "진실"은 '진리'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 싸우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절정은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로 끝났습니다.

한 등반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두 다리로만 걸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로프의 반대편 끝에서 그를 붙잡고 있는 베테랑 등반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발을 헛디뎌도, 힘이 빠져도, 반대편의 사람이 그를 붙잡고 있는 한 그는 추락하지 않습니다. "
취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필람바노'는 실제로 폭력적인 체포 장면에 쓰이던 단어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로마 군인들이 구레네 시몬을 억지로 붙잡아 십자가를 지운 장면, 베드로가 물에 빠질 때 예수님이 그를 붙드신 장면에서도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강력하게, 거의 강제로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진짜 의미는 이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인 당신을 영원한 생명 안으로 강력하게 붙드실 것이다." 우리가 놓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여기서 "증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오'는 '동일한'이라는 말과 ''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즉 같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증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13절).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며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지만, 정작 진리이신 그분 앞에 서 있으면서도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진리를 사형장으로 넘겼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든, 진리에 무관심한 빌라도와 같은 사람 앞에서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한결같이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디모데도, 오늘 우리도 그 동일한 진리의 말을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마치 어느 통역사가 원어민의 말을 한 치의 왜곡도 없이 그대로 전달하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14절). 이 구절은 흔히 '예수님이 다시 오실 미래의 그날까지 잘 살아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나타나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파네이아'는 '계시, 출현'이라는 뜻이며, "지키라"의 '테레오'는 마음에 품고 새긴다는 뜻으로 과거형입니다. 즉 이 말씀은 미래의 재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은혜를 입는 그 순간까지,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된 이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한 노인이 평생 간직해 온 낡은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쟁 중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잃은 전우의 사진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다시 그날의 은혜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그의 남은 삶을 결정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는 그런 사진과 같습니다. 다만 그 십자가의 은혜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송영을 드립니다.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15~16절). 이 말씀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앞의 14절 문맥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 모든 영광의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분만이 죽음이 없는 유일한 생명이시며, 어둠과 전혀 상관없는 빛이시며,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처음의 이야기에서 빚진 사람은 스스로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빚을 대신 갚고 그를 옮겨준 이가 있었기에, 그는 마침내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에서 도망칠 수 없고, 스스로 의와 경건과 사랑을 이루어낼 수 없고, 스스로 믿음의 싸움을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이끌어 내시고, 자신에게 계속 소속시키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고, 영원한 생명 안으로 강력하게 붙드십니다. "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이 은혜를 날마다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그 십자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존귀와 영원한 권능은 우리가 아니라, 오직 그분께 돌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