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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디모데전후서

디모데후서 - 복음의 고난, 두려움 대신 주어진 사랑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0.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1~8)

1944년 2월, 네덜란드 하를렘의 한 시계방 다락방에서 여든네 살의 노인 카스퍼 텐 붐이 나치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의 딸 코리 텐 붐과 벳시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을 숨겨준 죄였습니다. 취조관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
지금이라도 다시는 유대인을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집으로 보내드리겠소." 시계방 주인이었던 카스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오늘 내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내일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다면 나는 또 그를 맞아들일 것이오." 그는 결국 감옥에서 열흘 만에 숨을 거두었고, 딸 벳시는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오직 코리만 살아남아 훗날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코리 텐 붐이 남긴 말 중에 잊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늘 아버지의 시계방을 떠올렸다고 말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손목시계를 고치며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얘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시계와 같단다. 내가 지금 너에게 이 시계를 준다고 해서 네가 시계 만드는 법을 아는 게 아니야. 그저 받는 것이지."

코리의 믿음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집 안에 거하셨던 그리스도께서, 딸의 삶 속에도 동일하게 찾아와 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었기에, 코리는 감옥에서도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디모데후서 1장의 말씀도 바로 이 이야기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두 통의 디모데서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가 주후 63년경 잠시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쓴 편지라면, 디모데후서는 67년경 다시 로마 감옥에 갇힌 채 쓴 편지, 그것도 그의 생애 마지막 서신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사랑하는 영적 아들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라면, 그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어야 할까요? 놀랍게도 바울은 처음 편지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감옥의 냉기 속에서도 그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여전히 같은 하나,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었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2절) 단순한 인사말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라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의 사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을 이렇게 변호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 바울은 오직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디모데를 "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릅니다. '디모데'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인데, 이는 단지 바울이 그를 전도해서 영적 아들로 삼았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디모데는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아들 된 자'로서 바울과 함께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 그 안에 있는 성도라면 누구든 이 진리의 아들 됨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는 원어로 보면 오히려 하나의 선언에 가깝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마치 시계방 주인 카스퍼가 딸에게 시계를 건네주었던 것처럼,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며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진 생명의 상태를 디모데에게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씁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3~4절) "밤낮 간구하는"이라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밤은 어두움의 상태를, 낮은 빛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죄악 가운데 있든 빛 가운데 있든, 언제나 계속하여 디모데를 기억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언약 안에서 앞서 섬긴 자들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감사하고"로 번역된 단어가 '카리스', 곧 은혜라는 것도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그런데 "
네 눈물을 생각하여"라는 구절은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눈물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어떤 수고에 대한 표현, 곧 율법적 행위를 상징합니다. 디모데가 흘렸던 많은 수고와 애씀의 눈물, 그것은 결국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몸부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눈물이 "삭제되는 것"을 오직 하늘의 즐거움이 주어지는 데서 찾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한 장면이 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닦아 주시니"에 쓰인 '엑살레이포'라는 단어는 '흔적을 없애다, 지워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려 했던 율법적 행위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흔적을 십자가의 은혜가 지워 버립니다.

코리 텐 붐이 훗날 자신을 고문했던 나치 친위대원을 라벤스브뤼크 이후 어느 집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손을 내밀며 용서를 구했던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코리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팔을 통해 흘러나오는 낯선 온기를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눈물과 원한의 흔적을 지우신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이어 디모데의 신앙의 뿌리를 언급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5절)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믿음의 가정을 본받아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자"는 식으로 읽습니다. 물론 그 자체가 틀린 적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은 조금 더 깊습니다. "
있더니"로 번역된 '에노이케오'는 '~에 거주하다'라는 뜻입니다. 로이스에게도, 유니게에게도, 디모데에게도 있었던 것은 물려줄 수 있는 어떤 소유물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삶 속에 동일하게 거하셨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믿음은 유전자처럼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카스퍼 텐 붐이 시계방에서 딸에게 했던 비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시계를 준다고 시계 만드는 법을 아는 것이 아니듯,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선물로만 주어집니다. 로이스와 유니게와 디모데, 그리고 바울과 오늘 우리까지, 모두가 같은 하나의 근원에서 값없이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된 한 언약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바울은 이제 디모데를 향해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6절) "다시 불일듯 하게 하다"라는 '아나조퓌레오'는 '위로부터'라는 뜻의 '아나'와 '불'을 뜻하는 '퓌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안수 받을 때 디모데 속에 주어진 그 믿음과 사명은, 인간의 의지로 계속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날마다 다시 불붙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벽난로에 한번 불을 지폈다고 해서 그 불이 저절로 밤새 타오르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매일 다시 하늘로부터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7절) 여기서 "두려워하는"에 해당하는 '데일리아'는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겁, 비겁함'에 가까운 강한 단어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은 능력과 사랑, 그리고 '절제'로 번역된 '소프로니스모스', 곧 분별력과 신중함입니다. 이 셋은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 드러나는 권세요 사랑이며 분별력입니다.

코리 텐 붐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이가 들끓는 막사 안에서도 벳시와 함께 몰래 감춰 온 성경을 펴놓고 다른 여인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녀 안에 없던 담대함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다시 불붙는 은혜가 매일 새롭게 부어졌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거짓 교사들과 싸워야 했던 디모데에게도,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두려운 현실과 마주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겁먹은 영이 아니라, 권세와 사랑과 분별의 영입니다.

편지는 이렇게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8절) "갇힌 자"라는 '데스미오스'는 사슬에 매인 죄수를 뜻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서 사슬에 매인 몸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표지로 말합니다. "함께 고난을 받으라"의 '슁카코파데오'는 '함께 불행이나 재앙을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된 자로서 그 고난 가운데 함께 있는 것입니다.

카스퍼 텐 붐이 취조관 앞에서 "
내일 또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다면 나는 맞아들일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고난을 피할 길이 있었지만 스스로 그 길로 들어갔습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난받으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디모데후서 1장 1절부터 8절까지, 죽음을 앞둔 노사도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은 것이며, 우리의 눈물과 수고의 흔적은 십자가의 은혜로 지워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분별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은 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감옥에서 배운 것은, 아무리 깊은 구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깊다는 사실이었다고. 오늘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 그 자리가 감옥이든 일상의 무게이든, 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 안의 은혜를 다시 불붙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