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디모데후서 1:9~18)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한 성도가 조용히 마음속으로 자신을 채점합니다. '이번 주엔 새벽기도를 세 번밖에 못 갔지. 전도도 한 번도 못했고. 이래서야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어떤 주에는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넉넉히 하고 나면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겠지.' 이 두 마음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자기 행위를 구원의 저울에 올려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면 안심하고, 게을리하면 불안해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마치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손에 쥔 채 부모님 앞에 서 있는 아이와 같습니다. 점수가 좋으면 당당하고, 나쁘면 주눅이 듭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는, 바로 이 성적표를 아이의 손에서 빼앗아 찢어버리는 편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9절). 여기서 "부르심"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소리쳐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이름을 지어 부르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부르심이 "영원 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아니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배열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명절, 온 가족이 모이는 큰 잔칫상을 준비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손님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어머니는 이미 그 사람이 앉을 자리, 그 사람이 좋아하는 반찬까지 헤아려서 상을 차려 놓습니다. 손님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집 대문을 들어섰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미 그를 위한 자리가 정성껏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이미 우리를 위한 은혜의 자리를 배열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적표를 들고 벌벌 떠는 아이가 아니라, 이미 자기 이름이 새겨진 방으로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그렇다면 영원 전에 계획된 그 은혜는 어떻게 우리 눈앞에 드러났을까요? 바울은 답합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10절). "폐하시고"라는 말은 어떤 힘을 못 쓰게 만들어 치워버린다는 뜻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집안을 어둡게 짓누르던 낡은 가구를, 힘센 사람이 단번에 들어내 마당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바로 그런 일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그날,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인류의 집안에는 죽음이라는 무겁고 어두운 가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죽음을 치워버리시고 그 자리에 썩지 않는 생명을 두셨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증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갔던 이 땅의 믿음의 선배들이,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자기 힘이 아니라, 죽음을 폐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고 말한 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2절). 지금 바울은 로마의 차가운 감옥 안에 있습니다. 인생의 화려한 시절은 지나가고, 사슬에 매인 늙은 몸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그가 믿는 것이 자기 신념의 힘이 아니라, 자신이 오랜 세월 인격적으로 경험하여 알게 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랜 세월 큰 병을 함께 이겨온 부부의 신뢰와 같습니다. 어느 한쪽이 병상에 눕는다 해도, 서로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세월 속에서 몸으로 확인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감옥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맡은 복음을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편지의 뒷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을 버린 두 사람,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언급합니다(15절). 이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함께 사역했던 이들로 보이는데,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그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바울에게 이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서운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복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집이 되기를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들을 정죄하며 글을 맺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봅니다. 인간은 십자가의 은혜가 붙들어주지 않으면 누구든 진리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거울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도, 은혜의 끈을 놓는 순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바울은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그의 이름은 "유익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로마까지 부지런히 찾아와 그를 만났습니다(16~17절). 세상 사람들이 죄수를 피해가던 그 순간, 오네시보로는 오히려 감옥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업이 망하고 사람들이 하나둘 등을 돌릴 때, 오히려 더 자주 찾아와 손을 잡아주는 오랜 친구와 같습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우정이야말로 진짜였다는 것을 모두가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단순한 인간적 의리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집에 긍휼을 넘겨주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흘려보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18절까지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구원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결정된 것이며, 그 은혜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죽음을 폐하고 생명을 드러냈고, 그 복음을 맡은 자는 고난 중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흘려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성적표를 들고 서 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우리는 여전히 이번 주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지 헤아리며 스스로를 채점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성적표는 애초에 필요 없었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영원 전부터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지어져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성적표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네시보로처럼 그 받은 은혜를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가고, 넘어진 이를 찾아가고, 사람들이 피하는 자리에 오히려 발걸음을 옮기는 것, 그것이 은혜받은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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