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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디모데전후서

디모데전서 - 받으실 만한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4.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ㅡ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5:1~8)

어느 겨울 저녁, 한 노인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신앙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습니다. 흰 머리카락과 굽은 허리가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청년 하나가 그 노인을 보며 무심코 말했습니다. "
어르신,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세요?"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알게 모르게 오래된 믿음을 향한 날 선 비판이 담겨 있었습니다. 노인은 잠시 청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떠올린 장면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라"(딤전 5:1). 언뜻 보면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예절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고, 젊은이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덕목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한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
하나님의 집"은 어떤 곳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교인들이 모이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진리의 기둥과 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그 죽음 위에 세워진 집입니다. 그렇다면 이 집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읽혀야 합니다.

"
늙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뷔테로스'는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먼저 된 자, 즉 복음으로 먼저 하나님의 집이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꾸짖지 말라"는 것은 그를 향해 겨누어 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공격하는 것은 그 사람을 먼저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하듯 하라"는 말씀은 혈육의 아버지를 잘 섬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 안에서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한번은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49~50). 이것은 혈육의 가족을 무시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 왕국에는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가족을 묶는 끈은 피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요 6:40)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성경에서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복음을 왕성하게 드러내는 젊은이들, 그들은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유배 중에도 자신과 함께 환난을 견디는 이들을 "형제"라 불렀습니다(계 1:9). 형제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 형제가 됩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 5:2). 여기서 "깨끗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그네이아'는 제의적 순결,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의 거룩함 안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청결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씻긴 교회가 지닌 정결함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
과부"에 대해 말합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딤전 5:3).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자칫 사회적으로 홀로된 여성을 잘 대우하라는 복지적 가르침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과부"는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율법은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는 율법에서 자유롭다고 말합니다(롬 7:1~6). 바울은 바로 이 언어를 빌려 복음을 설명합니다.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으나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사실상의 "과부"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선물로 주어야 합니다.

"
존대하라"의 헬라어 '티마오'에는 "선물을 주다, 보상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복음을 가진 교회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복음을 선물로 전하는 것, 그것이 참 과부를 존대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안나 선지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녀는 일곱 해 동안 남편과 살다가 과부가 되어 팔십사 세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눅 2:36~38). 그리고 마침내 아기 예수를 보았을 때, 그녀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안나의 삶은 세상과 결별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 머물러 있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
외로운 자"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간구와 기도를 한다는 것(딤전 5:5)은 바로 이런 삶입니다.

반면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약 4:4). 교회가 세상과 손을 잡고 안락하게 살아갈 때, 그것은 이미 죽은 삶입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생명의 근원과 단절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코리 텐 붐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언니 베치가 죽어가는 수용소의 막사에서도 성경을 읽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것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
과부로 홀로 남겨졌다"는 의미의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이 말씀은 혈육의 가족을 잘 부양하라는 권면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친족"은 헬라어로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고, "가족"은 '집에 속하는 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친족이요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것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복음을 받고서도 그 복음의 무게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내어주셨으니,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습니다(엡 5:26~27). 하나님의 집은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워진 집입니다. 그 집 안에서 진리로 먼저 된 자를 아버지처럼 대하고, 복음으로 형제 된 자를 형제처럼 대하며,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선물로 들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화려한 예배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잘 정비된 교회 조직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교회가, 그 복음을 붙들고, 그 복음을 나누며, 그 복음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 집 안에서 들려오는 오래된 복음의 말씀, 그것이 하늘 아버지께 올라가는 향기로운 예배입니다.

겨울 저녁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섰던 그 노인은, 사실 수십 년 동안 그 복음을 붙들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침묵 속에 자리에 앉았을 때, 그의 침묵은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래 견뎌온 믿음의 무게였습니다. 그 무게를 알아볼 수 있는 눈, 그것이 하나님의 집 된 자들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