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디모데전서 4:7~16)
1940년대,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코리 텐 붐은 훗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수용소에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살린 것은 성경을 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경 속에서 나를 붙들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 한 문장 안에 디모데전서 4장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집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새벽기도를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금식도 자주 했으며, 술과 담배는 물론 커피조차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매일 몇 장씩 읽었고, Q.T. 노트는 몇 권째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참 신앙이 좋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가 설교 중에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금식합니까? 왜 새벽기도에 나옵니까? 혹시 그 모든 것이 스스로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은 아닙니까?" 집사는 집에 돌아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정확히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 모든 일을 하는 동안, 마음 한편에는 늘 이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했습니다. "나는 남들과 다른 사람이다. 나는 신앙의 전설이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가리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를 풀면 더 선명해집니다. "망령되고"로 번역된 '베벨로스'는 '속된 것, 신성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허탄한"으로 번역된 '그라오데스'는 문자 그대로 '늙은 여자같이 보인다'는 말, 즉 노쇠하고 어리석은 미신과 같다는 뜻입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이 표현은 근거 없는 미신적 이야기를 가리킬 때 쓰던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의 가르침인 혼인을 금하고 특정 음식을 먹지 말라는 금욕주의적 규정을 이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거룩해 보여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은 늙은 여인의 미신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신화는 살아있습니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면 거룩해진다는 신화,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으면 복을 받는다는 신화, 헌금을 많이 드리면 사업이 잘된다는 신화, 그리고 가장 위험한 신화인 나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으므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신화입니다. 이것들이 왜 신화입니까? 그것들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들 안에 나 자신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신화들을 "버리라"고 말힓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헬라어로 디포태 동사, 즉 내가 능동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무관하게 주권자에 의해 거절되고 버려진다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르틴 루터가 수도사 시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였습니다. 금식을 했고, 차가운 돌바닥에서 잠을 잤으며, 고해성사를 하루에도 수십 번 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서를 묵상하다가 그는 발견했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그 순간, 루터는 자신이 그토록 쌓아올린 모든 종교적 탑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탑을 허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그 탑을 허물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버려짐'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내면을 장악하실 때, 율법으로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욕망은 저절로 거부되고 밀려납니다. 그것은 내 의지의 승리가 아니라 말씀의 주권입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는 말씀에서 '연단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귐나조'는 고대 그리스 운동 경기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헬라 문화에서 운동선수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즉 '벌거벗고' 훈련했습니다. 모든 군더더기를 벗어버리고 오직 운동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할 때, "네 자신이 소유한 것을 훈련하라"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소유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종교적 열심은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훈련은 내가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체가 다릅니다.
마치 훌륭한 첼리스트가 되는 것과, 위대한 곡을 충실히 연주하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전자는 나 자신이 목적이고, 후자는 음악이 목적입니다. 둘 다 열심히 연습하지만, 그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진정한 연주자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작곡가의 의도가 청중에게 온전히 전달되도록 자신을 도구로 내어드립니다.
바울은 10절에서 말합니다.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헬라어 원문에서 '하나님' 앞에 관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질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살아있는 생명 자체로서의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바울은 수고하고('코피아오', 열심히 애쓰다) 힘쓰는('아고니조마이', 싸우다, 다투다) 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씨름하고, 진리를 붙들고, 복음을 전하며 투쟁하는 것이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몸이 뛰고 달린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행위를 부지런히 수행한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사람 안에서, 한 공동체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는 것이 살아있음입니다.
창세기 5장에 이런 단 한 줄의 기록이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어떤 율법적 행위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금식을 했는지, 어떤 종교적 업적을 쌓았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단 하나만 기록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 동행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잡아(에페코) 계속 머물러 있으라(에피메노)." '에피메노'는 현재형 동사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동행은 위대한 업적이 아닙니다. 매 순간 그 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에녹의 흔적은 세상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하나님 안에 새겨졌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이 구절에서 "네 자신"은 앞 문장에 붙어야 할 말입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네 안에 있는 말씀이신 그분의 가르침을 굳게 잡아 계속 머물러 있으라. 왜냐하면 이것을 행함으로 듣는 자들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디모데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 안에 있는 말씀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가 구원하십니다.
코리 텐 붐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녀가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그녀를 붙들고 계신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아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Q.T.를 성실하게 해서 전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이미 붙들린 자들입니다. 그 붙들림 안에서 사는 것이 경건이고, 그것이 동행이며, 그것이 살아있음입니다. 전설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그분이 쓰시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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