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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디모데전후서

디모데후서 - 하나님의 견고한 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0.

디모데후서 2장 14~19절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폭풍우 치는 밤, 작은 배 안에 선원들이 모여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파도가 배를 사정없이 뒤흔들 때, 선원들 사이에서 갑자기 말싸움이 벌어집니다.
"누가 키를 잘못 잡았느냐", "이 항로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두고 언성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정작 그 배가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논쟁이 옳고 그름을 가려서가 아닙니다. 배의 용골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배 밑바닥의 뼈대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4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은 바로 이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지금 영지주의라는 거센 풍랑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풍랑 속에서 디모데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
너는 그 배 위에서 말싸움을 하고 있느냐, 아니면 배의 용골을 붙들고 있느냐."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14절). 여기서 "이 일을 기억하게 하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을 상기시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 '휘포밈네스코'는 '어떤 것을 근거로 삼아 다시 떠오르게 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삼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라고 외쳤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반면 "
말다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고마케오', 곧 '말씀을 대적하며 싸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견 대립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논쟁거리로 전락시키는 행위입니다. 마치 어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려 할 때마다 자녀가 "그 표현 방식이 맞느냐 틀리느냐"만 따지고 든다면, 정작 그 사랑 자체는 전달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베소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은 복음의 본질보다 신화적 족보와 율법적 논쟁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겉보기엔 신앙적인 열심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 유익도 없고 오히려 듣는 자들을 "뒤집어 엎는"(원어 '카타스트로페', 즉 재앙과 파멸을 뜻하는 단어입니다)결과만 낳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 어느 구절의 해석, 어느 교단의 전통, 어느 신학적 용어를 두고 끝없이 논쟁하면서도 정작 그 논쟁의 열기 속에서 십자가는 잊혀지는 경우 말입니다. 바울의 처방은 단순합니다. 논쟁을 이기려 하지 말고, 하나님 면전에서, 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다른 신처럼 서지 않는 자리에서, 오직 십자가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절)."옳게 분별하며"로 번역된 '오르도토메오'는 원래 험한 산길이나 울창한 숲에서 여행자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똑바른 길을 내는' 작업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등산로를 개척하는 안내인의 모습입니다. 길을 잘 아는 안내인은 등산객들 앞에서 화려한 말솜씨를 뽐내지 않습니다. 다만 묵묵히 바른 길을 내어, 사람들이 헤매지 않고 정상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디모데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사람들이 곧게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일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원어 문장의 순서를 보면, "
힘쓰라"에 해당하는 '스푸다조'가 문장의 맨 앞에 과거 명령형으로 놓여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라는 뜻이라기보다, "너는 이미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분 곁에 세워진 자다"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명령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고 했던 것도 같은 방향입니다. 우리의 섬김은 자격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이미 세워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16~17절). "악성 종양"으로 번역된 '강그라이나'는 의학적으로 괴저를 뜻합니다. 몸의 한 부위에 생긴 염증이 방치되면 서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주변 조직을 썩게 만들어 결국 전신을 위협하는 병입니다. 처음엔 작은 상처처럼 보이지만, 손쓰지 않으면 반드시 퍼져나갑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두 거짓 교사의 가르침이 바로 이런 병과 같았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
퍼져나감"이라 번역된 단어 '노메'는 본래 '꼴, 목초'를 뜻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실 때 쓰인 단어와 같습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얻는 꼴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퍼뜨리는 ""은 양들을 병들게 하고 부식시킵니다. 겉보기엔 둘 다 무언가를 "먹이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마치 겉보기엔 똑같이 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것 같아도, 하나는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서서히 몸을 병들게 하는 독인 것과 같습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18절).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보고 영적인 것만을 선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고, "부활은 이미 영적으로 일어났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겉보기엔 더 영적이고 심오한 신앙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단순한 재생이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살아 계신 생명 그 자체입니다(요 11:25). 이 진리를 흐려버리면, 믿음의 기초 자체가 무너집니다. "무너뜨리느니라"의 원어 '아나트레포'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셨을 때(요 2:15)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 거짓 교훈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언가를 뒤엎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절정은 19절에 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여기 "그러나"로 번역된 '멘토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득세하고, 어떤 이들의 믿음이 무너지고, 논쟁과 병든 가르침이 교회 안에 퍼져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터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처음에 상상했던 그 폭풍우 속의 배로 돌아가 봅시다. 선원들이 갑판 위에서 아무리 다투어도, 배 밑바닥의 용골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터는 사람의 논쟁이나 신념의 강도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세워졌기 때문입니다(고전 3:11). 그리고 이 터 위에는 성령의 "인침"이 있습니다. 인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도장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흔들려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도장 찍어 놓으셨습니다. "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말씀에서 "아신다"는 단순한 정보적 지식이 아니라, 구약의 '야다'처럼 인격적으로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미 "주의 이름이 된 자"입니다. 그런 자는 과거 명령형으로 표현된 것처럼, 이미 모든 불의에서 떠나 있는 존재로 규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견고한 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결국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오늘 나는 갑판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싸움에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는가, 아니면 흔들리지 않는 그 터 위에 서서 오직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길잡이로 살고 있는가? 폭풍은 그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거짓 가르침은 여전히 병처럼 퍼져나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배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그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