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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기름과 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4.

"기름과 피는 어디서 살든지 영원히 먹지 말지니라. 이는 너희의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레위기 3:17)

어느 신학교 교수가 강의 첫날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
여러분, 지금까지 살인한 적이 있습니까?" 강의실은 웃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둑질한 적이 있습니까?" 역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교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성경을 읽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사람의 계명은 인간을 의인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주일 예배를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고,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스스로 꽤 믿음이 좋다는 착각에 이릅니다. 계명의 기준을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 놓으니, 누구나 합격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은 결국 자기 의라는 안락한 방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다릅니다. 그것은 인간을 죄인의 자리로 몰아세웁니다. "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읽으면, 그것은 단순히 칼을 들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 동료를 시기하는 눈빛, 경쟁자를 향한 은밀한 쾌재, 그것이 이미 살인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것을 탐하는 욕망의 흐름, 그것이 이미 도둑질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 서면 인간의 내면은 발가벗겨집니다. 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의로움이 아니라 철저한 파산입니다. 계명은 우리를 합격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낙제해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레위기 3장 17절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
기름과 피는 어디서 살든지 영원히 먹지 말지니라. 이는 너희의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현대 교회는 이 말씀 앞에서 묘한 이중 잣대를 들이댑니다. 십일조, 주일 성수, 헌신, 교회 운영에 유익이 되는 율법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이 규례처럼 지키기 모호하거나 현실적 유익이 없어 보이는 말씀 앞에서는 슬쩍 한 발짝 물러섭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으니까요"라는 말이 그럴듯한 방패막이가 됩니다.

그러나 "
영원한 규례"라는 말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한시적으로 주어진 민족의 관습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 규례의 의미를 문자의 껍데기 안에서만 찾으면 길을 잃습니다. 기름과 피, 이 두 상징은 인간 구원의 근본 구조를 가리키는 깊은 언어입니다.

기름은 심장이나 간처럼 독립된 하나의 기관이 아닙니다. 내장 여기저기에 엉겨 붙어 있는 것입니다. 갈비뼈 안쪽에도, 위장 주변에도, 콩팥 둘레에도 달라붙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화목제를 드릴 때 이 기름을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어 제단 위에 불살랐습니다. 하나님이 "
기름은 내 것"이라 하시며 제단 불 위에 올리라 명하신 것은, '몸으로부터 분리된 것'만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한 선교사가 인도의 어느 가난한 마을에서 사역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공항에서 그의 짐 가방을 열어보니 옷가지 대신 현지인들이 준 작은 선물들인 조개껍데기, 말린 꽃잎, 손으로 짠 천 조각이 가득했습니다. 마중 나온 후원 교회 목사가 물었습니다. "
귀한 것들을 다 현지에 두고 왔군요." 선교사가 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귀한 것들을 다 가져왔습니다." 그가 귀국할 때 가져온 것은 현지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잘살도록, 성공하도록, 더 굳건히 뿌리내리도록 돕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내장에 엉겨 붙은 기름을 손으로 떼어내듯,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성공 방식, 세상이 정의하는 행복의 기준으로부터 우리를 뜯어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애굽을 탈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손 아래서 신음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강하신 팔로 그들을 강제로 끌어내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도달하는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떼어내시는 은혜입니다. 몸에서 분리된 기름처럼, 나의 행위와 능력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자기 부인이 곧 참된 믿음의 첫 걸음입니다.

피는 죽음입니다. 제물이 죽어야 피가 흐릅니다. 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생명의 소멸을 눈앞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합니다. "
누군가 죽었다. 그 죽음이 네 자리를 대신했다."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단순한 위생 규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 선언입니다. 피로 이룩된 구원, 즉 그리스도의 대속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소유하거나, 자기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삼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중세 유럽의 어느 성당에는 이런 관행이 있었습니다. 부유한 귀족들이 면죄부를 사들여 자신의 죄를 돈으로 탕감하는 것이었습니다. 피로 이룩된 구원을 인간의 재물과 교환하려 한 것입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이 뒤틀린 구조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돈으로 살 수 없다." 피는 인간의 열심으로 살 수 없고, 인간의 공로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피 앞에서 인간의 금식, 헌신, 눈물, 도덕적 노력은 아무런 교환 가치가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을 좋게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인간이 그 사역에 기여할 수 있는 지분은 0%입니다.

기름과 피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포는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단 1%도 없다." 이것은 처음 들으면 불편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기여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했으니, 내가 오래 헌신했으니, 내가 많이 희생했으니, 그 공로 위에 구원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바로 그 욕망이 복음의 가장 강력한 적입니다.

한 노신사가 임종 자리에서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
목사님, 저는 평생 예배를 빠진 적이 없습니다. 구역장도 했고, 건축헌금도 드렸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집사님, 그것들을 다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그것들을 들고 가시면 서실 자리가 없습니다." 노신사는 한참 침묵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군요. 빈손으로 가는 것이군요."

참된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자신의 공로가 전혀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빈손으로 서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복음 안에 서는 유일한 자세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이 길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열심히 쌓은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니. 그러나 바로 그 내려놓음의 자리에서 주님의 의가 채워집니다.

기름처럼 세상으로부터 떼어내어지고, 피 앞에서 자기 공로를 비워내는 것, 그것이 율법주의의 패배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해방입니다. 그 해방을 살아내는 것,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과 다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레위기의 오래된 규례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살아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