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위기 3:3~5)
주일 아침, 예배가 끝난 뒤 로비에서 두 사람이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한 사람은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해 온 집사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얼마 전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새 신자입니다. 새 신자는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저는 요즘 사업이 너무 힘들어서요. 하나님께 제발 도와달라고, 이번 한 번만 살려달라고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집사님의 얼굴에 잠깐 뭔가가 스칩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분은 아직 기복적 신앙에 머물러 있구나. 신앙이 좀 더 깊어지셔야 할 텐데.'
이 장면에서 누가 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사람일까요? 놀랍게도, 성경은 그 집사님 쪽에 더 엄중한 시선을 보냅니다. 새 신자의 기도는 적어도 솔직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도움을 구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타인의 신앙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자리, 즉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남 욕하지 마라'는 도덕적 훈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너희는 아무도 타인을 심판할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비판이 예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비판하는 자 자신이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 열심으로 개선해보겠다'는 종교적 의욕인 성경을 더 읽고, 기도를 더 하고, 봉사를 더 하고, 남들보다 신앙적으로 앞서가겠다는 다짐은 사실 아주 위험한 자기기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하나님 앞에 '내 의'를 들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열심을 기뻐하시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기 의를 정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발 믿어달라고, 착하게 살아달라고, 교회에 나와달라고 간청하시는 것.' 마치 하나님이 인간의 결정을 애타게 기다리며 설득하고 계신 분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 제자들에게 왜 비유로 말씀하시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십ㄴ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도록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일은 인간의 총명함이나 의지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붙드신 자, 말씀 안으로 끌어당기신 자만이 그 말씀의 빛 아래서 자신의 실체를 보고,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택하시고 부르시는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이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구원이 인간의 이해력이나 결단력에 달려 있다면, 가장 똑똑하고 의지력 강한 사람이 가장 잘 믿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은혜가 아닌 능력 경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아,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충분히 하고 있는 걸까, 아닌 걸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점검하고, 부족하면 자책하고, 잘하면 은근히 뿌듯해합니다. 말씀은 그에게 항상 일종의 성적표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같은 말씀 앞에서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아, 이 말씀이 요구하는 것을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셨구나.' 그는 '내가 해야 할 것들의 목록' 앞에서 더 이상 짓눌리지 않습니다. 그 모든 요구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행위에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고, 정확히는 작별을 고하고, 오직 주님이 이루신 의만을 붙듭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읽다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구절에서 멈췄을 때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시는 공의'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임을 깨달은 순간, 루터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 순간 다시 태어났고, 열린 문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말씀 밖에서 말씀을 바라보던 사람이, 말씀 안으로 들어온 순간이었습니다.
레위기 3장에는 화목제를 드리는 규례가 나옵니다. 화목제는 이름 그대로 하나님과의 화목, 즉 관계 회복을 위한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규례 안에 놀라운 디테일이 숨어 있습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 제물의 내장을 덮은 기름과 콩팥의 기름을 떼어내어 태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에서 태웁니까? 그냥 별도의 불에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제단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번제물 위에 얹어서 함께 태워야 합니다. 이 사실이 핵심입니다.
번제는 무엇입니까? 번제물에 안수한다는 것은 "이 짐승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제물은 각이 떠지고, 불에 태워지고, 재만 남습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며 예배자는 이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다. 저 재가 바로 나의 실체다.'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근본적으로 소멸되어야 할 죄인임을 선언하는 제사였습니다.
그 번제물이 타오르는 위에 화목제의 기름을 얹습니다. 화목,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번제 위에서, 번제와 함께, 번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규례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내 노력과 열심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아 소멸된 자리, 즉 대속의 죽음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오랫동안 멀어진 아들과 화해하고 싶다고 하자. 아들은 아버지 앞에 선물을 들고 나타나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이제 잘할게요. 이것 보세요, 제가 이렇게 노력했어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선물이나 노력의 증명이 아닙니다.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화목은 '내가 이 정도는 한다'는 협상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협상 테이블 자체가 불에 타야 즉, 내 의가 완전히 소각되어야 그 자리에서 진짜 화목이 시작됩니다.
에스겔 33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바벨론에 무너지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맞아, 우리 죄 때문에 망한 거야. 이제 우리가 정신 차려서 다시 믿음을 회복해야지. 우리가 더 잘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다시 돌아봐주실 거야." 이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종교적 반응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더 잘하겠다고 다짐하고,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 하신 말씀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살기를 기뻐한다"고 하실 때, 그 돌이킴은 악인이 스스로 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나의 길에서 눈을 들어, 나를 책임져 주시는 주님의 의의 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스스로 돌이킬 능력은 없습니다. 그 방향 전환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 힘으로 살아남겠다는 집착을 내려놓고 주님의 손에 나를 맡기는 것뿐입니다.
20세기의 순교자 코리 텐 붐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수용소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를 오랫동안 물었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하나님이 나를 찾고 계신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고." 돌이킴은 내가 방향을 트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를 향해 와 계신 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십자가는 번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저주받아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각이 떠지고, 불에 태워지고, 재가 되는 자리를 대신 걸어가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는 번제물이 타오를 때의 소리였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이 가능해진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번제물인 예수님의 대속 위에서 우리의 화목이 완성된 것입니다. 레위기의 규례가 수천 년 전에 이미 이 진리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하나입니다. 내 노력, 내 열심, 내 성실함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나를 얹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기름이 번제물 위에 얹힌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이 오직 예수님의 의 위에 놓여야 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잠듭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걷지도 않고, 길을 찾지도 않고, 힘을 쓰지도 않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등에 몸을 맡기고 잠든 것뿐입니다. 그래도 아이는 집에 도착합니다. 아버지가 데려다 주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전혀 없이, 예수님의 의에 완전히 업혀서, 천국까지 실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믿음 상태를 점검하느라 매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요즘 믿음이 좋은가, 나쁜가? 나는 충분히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여전히 나를 중심에 놓는 질문입니다. 성도가 물어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셨는가?' 그 대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렇다입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내 의는 쓰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의만 남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번제물 위에 기름이 얹혀 타오르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참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화목을 받은 자는 이제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 그 한 마디가, 우리의 모든 종교적 분투를 내려놓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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