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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속죄제, 나의 죄를 담아 드리는 제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레위기 4:1~7)

어느 날, 한 청년이 오래된 교회 서재에서 낡은 성경책을 펼쳤다가 레위기를 마주쳤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페이지를 넘길수록 규정은 더 촘촘해졌습니다. 피를 어느 쪽 벽에 뿌려야 하는지, 기름은 어느 부위를 떼어 태워야 하는지, 그릇은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청년은 책을 덮으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 질문은 사실 꽤 예리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답이 바로 속죄제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이 '
복잡함'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건축가 친구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친구가 설계도 한 장을 내밀며 이렇게 말합니다. "기둥은 반드시 이 자리에, 이 두께로, 창문 방향도 이쪽이어야 해, 네 마음대로 바꾸면 건물이 무너져." 처음엔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말은 곧 이런 뜻입니다. "이 설계에는 네가 임의로 바꿀 수 없는 완전함이 있다."

레위기의 제사가 그렇습니다. 피를 동쪽 벽에 뿌릴지 서쪽 벽에 뿌릴지까지 하나님이 직접 정하셨습니다. 인간이 끼어들어 "
저는 이 방식이 더 경건하게 느껴집니다"라고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규정의 까다로움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공로가 개입할 틈을 원천 차단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속죄제의 핵심 장면은 제물을 잡기 직전에 있습니다. 제사장은 흠 없는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습니다. 이것을 안수라고 합니다. 이 동작 하나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운동회를 떠올려 보십시오. 달리기 선수를 정할 때, 자기 대신 빠른 친구에게 등을 밀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
네가 나 대신 뛰어줘." 안수는 그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무거운 행위입니다. "내 죄와 내 죽음을 네게 넘긴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물음이 시작됩니다. 안수하는 자, 즉 '
'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성경은 인간을 아담의 후손으로 규정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죽음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그의 모든 자손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죄 안에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치 빚더미에 앉은 아버지의 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빚쟁이인 것처럼, 우리는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속죄제에 담겨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선행이 아닙니다. 나의 헌신도 아닙니다. 오직 나의 죄와 나의 죽음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엄청난 정성을 쏟았습니다. 최고급 소를 골라 흠을 살폈고, 절차 하나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제사들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이런 학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 성적이 형편없어서 과외 선생님 앞에 앉았는데, 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
선생님, 저 지난주에 도서관도 갔고요, 노트 정리도 했고요, 예습도 했어요."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어필하는 것입니다. 그 학생은 자신의 노력을 들고 선생 앞에 앉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랬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 죄를 담아 보낸 것이 아니라, '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는 자기 공로를 담아 드렸습니다. 제사의 형식은 완벽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죄가 아니라 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의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무너진 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상한 심령,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마십시오. 상한 심령은 단순히 "제가 오늘 거짓말을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같은 행동 목록의 반성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 종교적 열심도, 내 헌금도, 내 봉사도, 내 신앙 경력도,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내밀 수 없는 더럽고 이기적인 것이었구나! 그 깨달음에서 오는 철저한 무너짐, 그것이 상한 심령인 것입니다.

레위기 4장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누구든지. 제사장도 예외가 없습니다. 지위고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더 엄격합니다.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전부를 어긴 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열 개의 쇠사슬 고리 중 하나만 끊어져도 그 사슬은 끊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솔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남을 미워했습니까? 몇 번이나 탐심을 품었습니까? 몇 번이나 거짓을 말했습니까? 600여 개의 계명 중 오늘 단 하나도 어기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
나는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의를 바치겠습니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출발점 자체가 이미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반발합니다. "
그럼 그냥 죄나 지으면서 살라는 말이에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이미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속죄제를 통해 하시려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 자신을 직시하라. 네 안에 있는 죄를 감추지 말고 그것을 담아서 나오라."

마치 의사를 찾아갈 때와 같습니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해야 치료가 시작됩니다. 괜찮은 척, 건강한 척하면 의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목적은 인간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인간이 철저한 죄인임을 드러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을 살리시는 사랑과 자비를 온 우주 앞에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그 드라마의 서막이었습니다.

구약의 흠 없는 수송아지는 결국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수천 년 동안 반복된 제사, 수백만 마리의 짐승이 담당할 수 없었던 것을 그분은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내 두 손이 그분의 머리 위에 얹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나의 거짓말, 나의 탐심, 나의 교만, 나의 종교적 위선까지, 그 모든 것이 그분께 전가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하심으로, 나는 그분의 생명 안에 서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기쁨은 "
나는 이만큼 잘 살고 있습니다"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이토록 철저한 죄인인데,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천국으로 이끌고 있습니다"를 고백하는 데 있습니다. 그 고백이 흘러나오는 순간, 레위기의 그 복잡하고 낯선 제사 규정들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수천 년 전부터 나를 위해 준비된 사랑의 언어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