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레위기 4:1~7)
어느 날, 한 청년이 오래된 교회 서재에서 낡은 성경책을 펼쳤다가 레위기를 마주쳤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페이지를 넘길수록 규정은 더 촘촘해졌습니다. 피를 어느 쪽 벽에 뿌려야 하는지, 기름은 어느 부위를 떼어 태워야 하는지, 그릇은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청년은 책을 덮으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 질문은 사실 꽤 예리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답이 바로 속죄제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이 '복잡함'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건축가 친구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친구가 설계도 한 장을 내밀며 이렇게 말합니다. "기둥은 반드시 이 자리에, 이 두께로, 창문 방향도 이쪽이어야 해, 네 마음대로 바꾸면 건물이 무너져." 처음엔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말은 곧 이런 뜻입니다. "이 설계에는 네가 임의로 바꿀 수 없는 완전함이 있다."
레위기의 제사가 그렇습니다. 피를 동쪽 벽에 뿌릴지 서쪽 벽에 뿌릴지까지 하나님이 직접 정하셨습니다. 인간이 끼어들어 "저는 이 방식이 더 경건하게 느껴집니다"라고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규정의 까다로움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공로가 개입할 틈을 원천 차단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속죄제의 핵심 장면은 제물을 잡기 직전에 있습니다. 제사장은 흠 없는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습니다. 이것을 안수라고 합니다. 이 동작 하나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운동회를 떠올려 보십시오. 달리기 선수를 정할 때, 자기 대신 빠른 친구에게 등을 밀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네가 나 대신 뛰어줘." 안수는 그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무거운 행위입니다. "내 죄와 내 죽음을 네게 넘긴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물음이 시작됩니다. 안수하는 자, 즉 '나'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성경은 인간을 아담의 후손으로 규정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죽음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그의 모든 자손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죄 안에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치 빚더미에 앉은 아버지의 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빚쟁이인 것처럼, 우리는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속죄제에 담겨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선행이 아닙니다. 나의 헌신도 아닙니다. 오직 나의 죄와 나의 죽음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엄청난 정성을 쏟았습니다. 최고급 소를 골라 흠을 살폈고, 절차 하나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제사들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이런 학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 성적이 형편없어서 과외 선생님 앞에 앉았는데, 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 지난주에 도서관도 갔고요, 노트 정리도 했고요, 예습도 했어요."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어필하는 것입니다. 그 학생은 자신의 노력을 들고 선생 앞에 앉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랬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 죄를 담아 보낸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는 자기 공로를 담아 드렸습니다. 제사의 형식은 완벽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죄가 아니라 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의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무너진 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상한 심령,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마십시오. 상한 심령은 단순히 "제가 오늘 거짓말을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같은 행동 목록의 반성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 종교적 열심도, 내 헌금도, 내 봉사도, 내 신앙 경력도,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내밀 수 없는 더럽고 이기적인 것이었구나! 그 깨달음에서 오는 철저한 무너짐, 그것이 상한 심령인 것입니다.
레위기 4장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누구든지. 제사장도 예외가 없습니다. 지위고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더 엄격합니다.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전부를 어긴 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열 개의 쇠사슬 고리 중 하나만 끊어져도 그 사슬은 끊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솔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남을 미워했습니까? 몇 번이나 탐심을 품었습니까? 몇 번이나 거짓을 말했습니까? 600여 개의 계명 중 오늘 단 하나도 어기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의를 바치겠습니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출발점 자체가 이미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반발합니다. "그럼 그냥 죄나 지으면서 살라는 말이에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이미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속죄제를 통해 하시려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 자신을 직시하라. 네 안에 있는 죄를 감추지 말고 그것을 담아서 나오라."
마치 의사를 찾아갈 때와 같습니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해야 치료가 시작됩니다. 괜찮은 척, 건강한 척하면 의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목적은 인간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인간이 철저한 죄인임을 드러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을 살리시는 사랑과 자비를 온 우주 앞에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그 드라마의 서막이었습니다.
구약의 흠 없는 수송아지는 결국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수천 년 동안 반복된 제사, 수백만 마리의 짐승이 담당할 수 없었던 것을 그분은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내 두 손이 그분의 머리 위에 얹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나의 거짓말, 나의 탐심, 나의 교만, 나의 종교적 위선까지, 그 모든 것이 그분께 전가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하심으로, 나는 그분의 생명 안에 서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기쁨은 "나는 이만큼 잘 살고 있습니다"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이토록 철저한 죄인인데,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천국으로 이끌고 있습니다"를 고백하는 데 있습니다. 그 고백이 흘러나오는 순간, 레위기의 그 복잡하고 낯선 제사 규정들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수천 년 전부터 나를 위해 준비된 사랑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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