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피 앞에서는 모두가 같습니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1.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그 속죄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레위기 5:7~10)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
하나님, 제 믿음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우리 아들의 믿음을 붙잡아 주세요." 아들은 아직 교회 문턱도 밟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내가 죽으면 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믿음이 아무리 커도 쟤 몫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는데.' 이 어머니의 불안은 낯설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마치 각자의 통장 잔고처럼 생각합니다. 내 믿음으로 내 계좌에 구원이 입금되고, 옆 사람의 계좌는 옆 사람이 알아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구원을 놓고 평생 근심하고, 심지어 중세 교회는 이 불안을 달래기 위해 연옥이라는 교리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돈을 내면 그 영혼이 정화된다는 발상 말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여기 한 창고지기가 있습니다. 그는 곡식 창고를 관리하며 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창고를 얼마나 성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곡식의 가치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찾아와 말합니다. "
이 창고 안의 곡식은 내가 채운 것이다. 네가 채운 게 아니야. 너는 그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믿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에베소서는 구원 얻는 믿음이 우리 스스로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이라면 받는 사람마다 품질이 다를 수 없습니다. 백화점에서 산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채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눈에 보이는 신앙의 분량으로 사람을 줄 세웁니다. 새벽기도를 몇 년 했는지,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 봉사를 얼마나 하는지를 기준 삼아 "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 "저 사람은 아직 멀었다"고 판단합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믿음의 분량'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오해가 생깁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
하나님이 사람마다 믿음을 다른 크기로 나눠 주셨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원어의 본래 의미는 '측량한 척도'에 가깝습니다. 즉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자로 우리를 재어 보면,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무능한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낮추어 보게 하는 척도라는 것입니다. 그 낮아짐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수술을 받고 장기 이식을 받았습니다. 이식받은 심장은 더 이상 '내 원래의 심장'이 아닙니다. 그의 생명은 이제 이식된 심장의 박동에 달려 있습니다. 수술 후 그가 "
그래도 내 원래 심장이 조금은 기여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의사는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원래의 몸은 병들어 있었고, 새 생명은 전적으로 이식받은 것에서 옵니다.

교회는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본래 몸은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영생의 몸입니다. 교회는 '내 몸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오래 믿은 자든 갓 믿은 자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오직 하나의 생명, 하나의 구원만이 존재합니다.

레위기의 말씀은 이 진리를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제사를 드리러 옵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소나 양을 끌고 옵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비둘기 두 마리나, 그것도 안 되면 고운 가루 한 움큼을 들고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
사함을 받으리라" 선언하십니다.

어느 부유한 상인은 살진 소를 끌고 제단으로 향하고, 가난한 농부는 곡식 자루 하나를 들고 그 뒤를 따릅니다. 만약 사람이 이 규정을 만들었다면 분명 이런 조항을 넣었을 것입니다. "
소를 바친 자는 특별석에, 곡식을 바친 자는 뒷줄에." 그러나 하나님의 제단에는 그런 줄 세우기가 없습니다. 재물의 값어치가 죄사함의 확실성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정하는 것은 단 하나, 제단에 뿌려지는 피입니다.

여기서 우리 마음에 슬며시 드는 계산이 있습니다. '곡식을 바쳐도 똑같이 사함받는다면, 나는 굳이 소를 바칠 필요 없이 곡식만 드려야겠다.' 이런 생각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사실 죄 사함보다 자기 소유의 소를 더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주받은 몸이라는 사실, 그래서 무엇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는 처지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애초에 이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떤 병은 환자 스스로 증상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기 검진에서 의사가 사진을 찍어 보여주기 전까지는, 환자 자신은 자기 몸속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라고 말하는 환자에게, 의사가 사진을 짚어가며 설명해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병을 깨닫습니다.

레위기 본문에서도 "
깨닫지 못하다가 깨닫게 되었을 때"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죄인은 스스로 자기 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대개 눈에 보이는 행동, 즉 도둑질이나 거짓말 같은 것만 죄로 여길 뿐, 자기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재물을 들고 제단으로 나아오게 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간섭이고 성령의 책망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
그래도 제가 재물을 준비해서 가져온 정성은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이끄신 과정에서 마지막 한 조각만 떼어 자기 것이라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늘 이 지점에서 속삭입니다. "너 자신을 좀 생각해봐. 네가 한 것도 있잖아."

야고보서는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종종 오해를 낳습니다. 마치 우리가 선한 행실을 많이 쌓아야 믿음이 살아난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행함이란 인간이 자기 열심으로 만들어내는 종교적 실적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 앞으로 이끄시고, 피를 의지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간섭, 그것이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믿음이란 선행이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자기 확신을 말합니다.

처음의 시장 풍경에서 소를 끌고 온 상인과 곡식 자루를 든 농부가 제단 앞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제사장이 피를 뿌립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차이는 사라집니다. 재물의 크기도, 사회적 지위도, 신앙 경력의 길고 짧음도 그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 그들 모두가 피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만 남습니다.

참으로 죄를 깨달은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 직분이나 신앙 경력, 헌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이미 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오래 믿은 성도든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사람이든, 우리 모두는 예수의 피가 아니면 하루도 설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 사실 앞에 함께 무릎 꿇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이 바로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