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사함을 받으리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6.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불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레위기 4:20~21)

어떤 사람이 무거운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갚을 능력도, 갚을 방법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나타나 그 빚을 전부 대신 갚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빚을 탕감받은 기쁨과 안도감만 가득 안은 채 돌아서버렸습니다. 자신을 위해 전 재산을 내어준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
이제 나는 자유다"라는 말만 남긴 채로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초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
죄 사함'은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구원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출발점을 종착역으로 착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죄 사함이고, 죄 사함을 받았으니 신앙의 목적을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어떤 이들은 "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죄가 해결되었으므로, 이후에는 더 이상 회개가 필요 없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의 중심을 '내가 확신하는 기쁨'에 두고, 그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믿음의 증거로 삼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나누어, 원죄는 예수의 피로 해결되었으니 건드릴 필요가 없고, 살아가며 짓는 자범죄만 그때그때 회개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레위기의 속건제를 그 근거로 끌어다 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그렇게 나누어 말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오류는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뿌리는 같습니다. 신앙의 중심에 예수가 아니라 '
'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무의식 중에 이런 질문을 품고 읽습니다. "
이 말씀이 나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는가? 내 삶을 어떻게 바꿔주는가?" 하나님을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해결사로, 복을 나누어주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따라 끝까지 걸어가보면, 그 끝에 서 계신 분은 ''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이스라엘의 역사도, 율법도, 제사 제도도, 선지자들의 예언도,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이 주(主)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거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구원은 인간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온 우주 앞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만 챙기고 자리를 뜹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이라는 선물만 받아 챙긴 채, 그 십자가를 지신 분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
먹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4장 20절은 말합니다. "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의 눈은 자연스럽게 '사함을 받으리라'는 결과에 꽂힙니다. 그러나 그 앞에 '속죄한즉'이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속죄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카파르', 곧 '가리다', '덮다'는 뜻입니다. 죄를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덮는 일을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제물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흠 없는 짐승이 끌려와 죄인의 손이 그 머리 위에 얹히고, 피가 흘렀습니다. 그 피가 죄를 덮었습니다. 제물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가려준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신 것입니다. 사함은 그 결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눈이 향해야 할 곳은 "
내가 용서받았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 제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피의 능력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암 선고를 받은 환자가 있었습니다. 살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가 수년간 밤을 새워가며 연구 끝에 치료제를 개발했고, 그 환자는 기적적으로 완치되었습니다. 완치된 환자가 "
나 이제 건강해졌어!"라는 기쁨에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온전한 감사가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 의사가 얼마나 수고했는가, 그 치료제에 얼마나 귀한 헌신이 담겨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함의 기쁨은 속죄의 은혜를 바라볼 때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레위기 4장 2절은 속죄제의 대상을 이렇게 말합니다. "
누구든지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이 말씀은 인간을 '허물 있는 자'로 규정합니다. 계명 하나를 어긴 것, 그것은 가벼운 실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리, 죽어야 할 자리입니다. 속죄제는 인간을 의인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죄인의 자리에, 죽어 마땅한 허물 있는 자의 자리에 세워놓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제물의 피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보게 만듭니다.

욥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욥은 누구보다 경건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셨을 때, 욥은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방식을 통해 욥을 본래의 자리로 이끌어가십니다. 친구들의 정죄도, 하늘의 침묵도, 육신의 고통도, 모두 욥을 한 곳으로 몰아갔습니다.

'
나는 의인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죄인이다.' 욥기의 마지막에서야 욥은 그 자리에 앉았고, 그제서야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제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품습니다. "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믿는 자로서 가치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언뜻 들으면 선한 질문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 안을 들여다보면, 그 뿌리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잘 살면 하나님이 칭찬해주실 것이다. 상급을 주실 것이다. 이 땅에서도 복을 주실 것이다.' 신앙이 일종의 거래 구조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을 쌓아 하나님께 생색을 내려는 욕망, 자신이 행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마음입니다.

로마서 5장은 이것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우리는 이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
의의 선물'을 과분하게 받은 자들입니다. 선물은 내가 벌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선물입니다. 그런데 선물을 받은 자가 이제 그 선물을 벌었다고 착각하거나, 앞으로 더 큰 선물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선물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받을 것을 계산하며 행동을 고치려는 신앙, 그것은 오히려 이미 받은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더 열심히 살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죄책감으로 우리를 눌러 행동을 교정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우리를 이 질문 앞으로 데려갑니다. "
내 죄를 누가,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마음이 살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어느 노신학자가 말년에 이런 고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
나는 평생 신학을 공부하고 설교를 했지만, 결국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단 하나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것 외에 내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리입니다. 자신이 행한 의를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을 자랑하는 자, 사함을 받은 것은 결과이고,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속죄의 은혜, 바로 그 은혜를 바라보며 평생 고개를 숙이는 자, 그것이 레위기의 제단 앞에 선 죄인이 배워야 했던 것이고, 오늘 십자가 앞에 선 우리가 배워야 할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