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위기 1:9)
어느 날 한 농부가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밭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평생 새벽마다 일어나 밭을 갈았고, 이웃을 도왔으며,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았습니다. "제가 이만큼 했으니, 이제 비를 내려 주십시오." 이 기도는 얼마나 인간적이며, 그리고 얼마나 위험합니까?
인류 역사에서 종교 없는 문명은 없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신에게 제물을 바쳤고, 마야인들은 피의 제사를 드렸으며, 오늘날에도 수억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 앞에 무언가를 올려놓습니다. 이 보편적인 행위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한 가지 공통된 심리가 있습니다. 바로 불안입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은 그 불안을 달래기 위해 초월적 존재에게 손을 내밀고, 동시에 그 존재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내어놓습니다. 정성, 헌신, 선행, 금식, 기도, 그 형태는 달라도 논리는 하나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응답해 주십시오." 이것이 종교심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본질이 사실은 매우 오래된 오류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는 형제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합니다. 가인도 정성을 다하지 않았겠습니까? 형이 아우보다 덜 성실했다는 말일까요?
그러나 문제는 성실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는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기름은 흘려질 피의 공로를 상징했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벨이 더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드린 제물이 가리키는 방향 때문이었습니다.
제물은 "나의 정성"이 아니라 "나를 대신할 희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가인의 땅의 소산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자신이 흘린 땀, 자신이 일군 수확, 자신의 노력입니다. 그것은 훌륭한 삶의 증거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거절은 가인의 성실함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 성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레위기 1장을 보면, 번제의 절차는 복잡하고 섬세합니다. 제물을 잡고, 피를 뿌리고, 각을 뜨고,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어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저 고대의 종교 의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 앞에 서 있던 이스라엘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제단의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제물이 타오를 때,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불길을 보며 무언가를 인식해야 했습니다. 저 불에 타야 할 것은 짐승이 아니라 나인 것입니다. 나는 저렇게 소멸되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제물은 그의 대리인이었습니다. 짐승이 대신 죽음으로써, 그는 잠시 그 심판 앞에서 살아남았습니다.
특히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 태우는 의식은 의미심장합니다. 내장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이 자리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정강이는 걸음, 즉 삶의 방향과 행보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번제는 단순히 짐승 한 마리를 태우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욕망과 나의 삶의 방식, 나의 종교적 열심까지도 불 앞에 내려놓는 상징적 죽음이었습니다.
레위기 1장 9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향기로운 냄새,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고기 굽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말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향기로운 냄새는 코로 맡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이 완전히 타오를 때,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의 공로도, 그의 정성도, 그의 종교적 노력도 모두 재가 됩니다. 오직 희생된 제물의 연기만이 하늘을 향해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는 바로 그 순간, 즉 인간의 의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대리 희생의 공로만이 남았을 때 피어오릅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는 내가 얼마나 헌신했는가, 얼마나 기도했는가, 얼마나 선하게 살았는가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나를 대신했다는 고백, 그리고 그 앞에서 나 자신의 의를 내려놓는 자리에서 피어오릅니다.
한 신학교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학생들의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구원의 통로입니다. 은혜의 상징입니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동시에 심판의 현장입니다. 거기서 죽어야 할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레위기 번제가 신약의 언어로 번역될 때 나타나는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통과해야 할 구원의 문일 뿐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자기 의와 종교적 공로가 소멸되어야 하는 심판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누구보다 열심 있는 종교인이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한 흠이 없었고,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 관한 한 교회를 핍박할 만큼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자신의 모든 열심과 공로를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절망의 고백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역동적인 신앙의 고백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다시 쌓아 올린 나의 의를 다시 내려놓는 삶. 그것이 번제단 앞에 서 있던 이스라엘 사람이 경험했던 것이고, 바울이 평생 살아낸 것이며, 교회가 매 주일 반복해야 하는 예배의 본질인 것입니다.
한 도시에 두 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는 지역 사회에서 매우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훌륭한 봉사 프로그램, 활발한 선교 활동, 헌신적인 성도들, 그리고 그 교회의 주보에는 매주 성도들의 봉사 시간과 헌금 액수가 기록되었습니다. 예배 후 사람들은 서로의 헌신을 칭찬하며 돌아갔습니다.
다른 교회는 작고 소박했습니다. 특별한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설교자는 매주 같은 자리로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마치고 나오며 자신의 헌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그럼에도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교회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고 있는 걸까요?
다시 처음의 농부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그가 타들어 가는 밭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무릎을 꿇는 것, 하나님을 찾는 것, 그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가 드린 기도, "제가 이만큼 했으니"라는 그 전제가 문제입니다.
만약 그가 이렇게 기도했다면 어떨까요? "저는 이 가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살았다 해도 그것이 당신의 은혜를 살 수 있는 값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그저 심판받아 마땅한 자인데,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이 자리에 나옵니다." 이 기도에는 공로가 없습니다. 대신 향기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가 타고 남은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향기가 있습니다.
레위기의 번제단은 사라졌습니다. 짐승의 피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번제가 말하려 했던 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내가 먼저 불 앞에 서는 것, 나의 의가 먼저 타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를 대신해 이미 타오르신 분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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