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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로마서 - 진리를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제사를 드려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22.

로마서 5장 10~11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복음서를 펼치면 이상한 순서가 눈에 띕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하나같이 세례 요한의 죽음을 오병이어 사건 바로 앞에 놓아 두었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오병이어보다 훨씬 먼저 있었던 일인데도 그렇습니다. 요한복음도 오병이어 앞에 요한 이야기를 붙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요한이 자신을 증거했다고 하시고, 곧바로 성경이 나를 증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삶과 죽음과 오병이어가 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요한을 죽인 사람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려다 아내로 삼았는데, 헤로디아는 형 아리스토불로스의 딸, 곧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조카를 삼촌 둘이 번갈아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왕궁이라고 해서 더 깨끗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 자기를 세워야 하는 인간이 갖고 싶은 것을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움켜쥐는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이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이야기를 희곡 《살로메》로 썼습니다. 거기서 살로메는 자기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오게 합니다. 희곡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이 세상 왕의 욕망을 얼마나 정확히 고발하는지 보여 주는 그림으로는 충분합니다.

그 왕궁에 광야에서 온 소리 하나가 들어섰습니다. "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자기 자격과 조건을 쌓아 행복에 이르려는 삶에서 돌아서라는 외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믿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는 소리였습니다. 모두 잠든 집에 불이 났는데 누군가 "불이야!" 하고 외치면, 그 사람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단잠을 깨운 귀찮은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헤롯에게 요한이 꼭 그랬습니다. 책망을 들은 헤롯은 요한을 옥에 가두었고 결국 목을 베었습니다. 말씀으로 살다 간 사람의 끝이 참수였습니다. 세상 왕은 언제나 말씀을 죽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 안에는 저마다 작은 헤롯이 삽니다.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을 들추는 말씀 앞에서 사람은 귀를 막거나 웃어넘기거나 화를 냅니다. 말씀이 자존심 앞에서 무시되고 조롱당할 때, 말씀으로 오신 예수는 또 한 번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무가치함과 불가능함과 부정함을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오병이어는 이 이야기를 광야에서 다시 그립니다. 요한이 말씀을 외치다 잡혀 간 바로 그 광야에 예수님이 서십니다. 왕궁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광야는 아무리 애써도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정착할 수 없는 땅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키우며 잘 먹고 산다고 하지만, 벗겨 보면 말씀에 굶주린 빈들입니다. 성도는 그 사실을 알게 되기에 광야에서 배가 고픕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모은 것을 다 가져와 보라." 남자만 오천, 여자와 아이까지 합쳐 수만 명이 가진 것을 모았더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어린 딸이 소꿉놀이를 하다 흙을 동글동글 빚어 "
엄마, 내가 만든 떡이야, 먹어 봐" 하고 내민다고 해 보십시오. 모양은 제법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엄마는 그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영양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가 꼭 그랬습니다. 보리떡은 부정한 사람이 제사에 올리던 짐승의 먹이였고, 물고기는 알을 낳아 불어나는, 부정하다고 여기던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서에는 보리떡을 똥불에 구워 먹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항변하자 하나님은 사람 똥 대신 소똥을 쓰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내밀며 자랑하는 것이 모양만 있고 알맹이는 없는 헛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리떡과 물고기를 그대로 나누어 먹이십니다. 오병이어를 "
작은 것도 드리면 하나님이 크게 불려 주신다"는 이야기로 읽는 이가 많지만, 본문은 훨씬 무시무시합니다. 자기가 쏟아 낸 것을 자기가 먹는 것이 심판입니다. 사람이 내놓은 것으로는 요기할 수 없고, 그것을 먹으면 함께 멸망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직접 그 보리떡과 물고기가 되어 죽으셨습니다. 사람이 먹고 죽어야 할 것을 대신 먹으시고, 성령으로 사람에게 먹히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분이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우신 까닭입니다.

누가복음 5장의 시몬 베드로 이야기도 같은 줄기에 있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시몬이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히고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외칩니다. 감동적인 장면 같지만, 그는 아직 자기가 왜 죄인인지, 이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눈앞의 기적에 압도되어 엎드렸을 뿐입니다.

무서운 사장 앞에서 "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허리를 굽히는 신입사원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충성은 진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장이 힘을 잃는 날 그 사람은 얼굴을 바꾸기 쉽습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큰 힘 앞에서 얼마든지 엎드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도 그렇습니다. 크신 분이고 까불면 큰코다칠 분이라 어쩔 수 없이 꿇는 무릎은 굴종입니다. 내가 더 강해지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굴종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 섬김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몬을 칭찬하시는 대신 그의 배를 땅에 대게 하시고 인생을 붙드셨습니다. 말씀을 담아 반석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함께였습니다.

바로 이어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온몸이 부정으로 가득한 그가 예수 앞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손을 대시자 병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관심은 오직 자기 병이 나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불이 난 집에서 소방관 등에 업혀 나온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나 살았다!" 하고 뛰어다니며 동네에 자랑합니다. 그 기쁨은 진짜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 불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자기를 업고 나온 사람이 어떤 위험을 무릅썼는지 모릅니다. 나병환자도 그랬습니다. 어떻게 나았는지, 자기 부정함이 얼마나 깊었는지 몰랐고, 예수를 내 병을 고쳐 주는 능력자로만 알았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전히 '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복음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이해의 수준에서 본 것은 아직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서 제사장에게 너 자신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하라." 말은 하지 말고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4장의 규례대로 나병에서 나은 사람은 일곱 날 동안 진 밖에 머물고, 털을 모두 밀고 옷을 빨고, 여덟째 날에 어린 양과 기름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일곱은 하나님이 완료하신 일을, 여덟째 날은 어린양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 일이 이루어졌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
말하지 말라"는 말씀은 침묵의 명령이 아니라 약속에 가깝습니다.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너를 내가 네 삶으로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죽어서 네가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네 인생이 제사가 되어 직접 증거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 말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광야에서 참수되었고, 오병이어를 먹은 사람들은 자기가 내놓은 것이 헛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성도는 지금도 광야 같은 삶 속에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는 고백으로 이끌려 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자마자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병 고침을 바라는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보통이라면 이때다 싶어 사람들을 앉혀 놓고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이해 없는 말이 불러 모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교회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죄와 영생과 예배와 헌신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오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
예수가 내 죄를 해결해 주셨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는 예수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자였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도 죄인이고, 하나님이 의인으로 여겨 주실 뿐입니다.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보리떡과 물고기뿐인데, 예수께서 그것을 다 먹으시고 대신 생명을 먹이십니다. 그러니 성도의 입에는 자랑 대신 이 한마디가 남게 됩니다. "나는 죄수다." 나를 주인공 자리에서 끌어내려 면목 없는 처음 자리에 앉히는 말입니다. 거기서부터 은혜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