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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로마서 - 한 데나리온의 아침, 은혜인가 보상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13.

로마서 5장 10~11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새벽 다섯 시 반, 아직 어둑한 인력사무소 앞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듭니다. 손에는 김이 나는 종이컵 커피를 들고 어깨에는 낡은 작업 가방을 멨습니다. 쉰여덟 살 병철 씨도 그 틈에 서 있습니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일을 잡지 못하면 저녁 밥상에 올릴 쌀값이 없습니다. 곧 트럭이 들어오고 반장이 손가락으로 사람을 고릅니다. "
너, 너, 그리고 너." 젊고 기운 좋은 사람들이 먼저 올라타고 떠납니다. 해가 높아질수록 마당은 헐렁해집니다. 점심때가 지나면 몸이 불편한 사람, 나이 많은 사람, 전날 술이 덜 깬 사람만 남습니다. 병철 씨는 무릎이 안 좋아서 오늘도 마지막까지 남았습니다. 오후 네 시가 넘자 그는 가방끈을 고쳐 멥니다. '오늘은 틀렸구나. 빈손으로 어떻게 집에 들어가나.' 이 이야기는 지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똑같은 풍경이 이천 년 전 예수님이 계시던 땅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풍경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예수님의 비유에는 포도원 주인이 나옵니다. 이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꾼을 구하러 나가서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은 그날 하루 가족이 먹을 양식, 곧 생명이었습니다. 일을 못 잡으면 온 가족이 굶어야 했으니, 주인의 부름은 목숨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주인은 아침 아홉 시에도, 낮 열두 시에도, 오후 세 시에도 다시 나갑니다. 그리고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 장터에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왜 아직도 여기 서 있느냐고 묻자 그들은 대답합니다. "
아무도 우리를 써 주지 않았습니다." 쓸모없다고 외면당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한 시간 남은 때에 쓸모없는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은 일손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주인은 "일을 시키려고"가 아니라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나갔습니다.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철 씨처럼 빈손으로 돌아가려던 사람에게 누군가 다가와 "이리 와라, 네 가족 먹을 것은 내가 주겠다" 하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주인이 곧 천국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먼 장소이기 이전에, 사람을 찾아 나서는 분입니다. 그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이 뜻입니다.

저녁이 되어 품삯을 줄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가장 늦게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씩 나눠 줍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하루치를 받는 것을 보고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입니다. '그럼 우리는 더 받겠구나.' 그런데 그들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러자 불평이 터집니다. "
저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안 했는데 종일 땡볕에서 일한 우리와 똑같이 대접하다니요!"

이상합니다. 아침에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누구보다 감사했습니다. 오늘 가족이 굶지 않는다는 생각에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기가 한 일을 계산하는 순간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이 들어섰습니다. 자기가 어디에서 구해졌는지, 곧 처음자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불러 주지 않았다면 그들도 하루 종일 굶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그 불평에 이렇게 답합니다. "
친구여, 나는 너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너와 약속한 대로 주었다. 내가 선해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네 눈에는 악하게 보이느냐?"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모두 똑같은 간식을 나눠 주었다고 합시다. 한 아이가 손을 듭니다. "저는 청소도 하고 숙제도 다 했는데, 숙제 안 한 쟤랑 똑같이 주시면 어떡해요?"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간식은 선물이 아니라 월급이 되고, 그 아이는 간식을 받고도 기쁘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 일을 가장 크게 겪은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금식하고 제사를 드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이 회개만 하고 자기들과 똑같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런 천국은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비유는 이렇게 끝납니다. "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일찍 와서 많이 일했다고 자랑하던 사람은 꼴찌가 되고, 면목이 없어 고개도 못 드는 사람이 앞선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알기에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그렇다고 게으른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처음자리가 사실은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대부분은 아닌 척하며 삽니다.

이 비유가 나오기 직전에 부자 청년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께 달려와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예수님은 그가 율법을 지키라는 말에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나를 따라오너라."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은행 잔고가 많은 사람만 뜻하지 않습니다. 좋은 성적, 많은 상장, 착한 행실, 남들의 칭찬처럼 "내가 이만큼 괜찮은 사람"이라고 내세우려고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 많은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러니 돈이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부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여행 가방을 산더미처럼 짊어진 사람은 좁은 지하철 개찰구에 걸려 한 발짝도 못 나갑니다. 자기 짐을 내려놓아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문이 그렇게 좁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키우고 쌓는 한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제자들도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

이때 베드로가 불쑥 나섭니다. "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얻겠습니까?" 부자 청년은 못 버려서 떠났는데 자신은 다 버렸으니 큰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교묘합니다. 버리는 일조차 "나 이만큼 포기했다"는 자랑이 되고 보상을 받으려는 계산이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속에도 숨은 부자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한 답으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약속하십니다. 집과 가족과 전토를 버린 사람은 "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계산이 가능한 백 배가 아니라 지금껏 가져 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것들이 영생의 재료가 될 수 없음을 알고 그것들에서 놓여나는 일, 곧 세상 것을 하나님보다 덜 사랑하게 되는 일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비유가 끝나자마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따로 부르십니다. "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인자가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부자 청년과 베드로와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는 전부 이 십자가를 설명하려고 모인 이야기입니다. 바늘귀 앞에서 막막하던 낙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로마서는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낙타가 다이어트를 해서 통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비대한 '나'를 이미 죽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감사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냥 두셨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그래서 성도는 자기 성숙이나 착함을 근거로 "
나는 구원이 확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는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서로 캐묻는 유행이 있었습니다. 정답은 "창세전에"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름을 부르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 자기 구원을 가장 확신하던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던 세리와 십자가 곁의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확신은 내가 얼마나 잘하는가가 아니라 나를 한번 붙드신 분이 절대 놓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흔들리는 우리지만, 우리를 붙드신 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후 다섯 시, 병철 씨 앞에 낡은 승합차가 멈춥니다. 운전석에서 한 사람이 내려 말합니다. "
어르신, 아직도 계셨네요. 오늘 하루치 일당을 드릴 테니 타세요." 한 시간만 일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병철 씨는 어리둥절합니다. 그는 한 시간 일하고 하루치 일당을 봉투에 받아 들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병철 씨는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쌀과 반찬을 사 들고 들어서는 문 앞에서, 그는 뭐라 말할지 고민했습니다. 자기가 번 돈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소리만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성도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불린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자를 찾아와 불러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은  말합니다. "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리고 시편 2편 12절은 "아들에게 입 맞추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쌓아 올린 내가 아니라 나를 찾아와 부르신 분입니다. 그분의 발 앞에 감사로 엎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이고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