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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로마서 - 잘살고 못사는 것의 차이는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5.

로마서 5장 10~11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한 해의 마지막 밤이면 많은 집에서 비슷한 풍경이 벌어집니다. 한 가장이 식탁에 앉아 통장 잔액과 한 해의 일정표를 훑어봅니다. 연봉은 올랐는지, 아이 학원비는 감당했는지, 직장에서 인정은 받았는지를 하나하나 따져 봅니다. 그렇게 숫자가 맞아떨어지면 마음이 놓이고 모자라면 한숨이 나옵니다. 세상은 이 계산을 가리켜 한 해를 '잘 살았다', '못 살았다'고 부릅니다.

두 가장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올해 승진했고 오래 꿈꾸던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사업이 기울었고 가족이 병원비로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결산서만 보면 한 사람은 성공한 해를, 다른 사람은 실패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은 교회 같은 줄에 앉아 같은 설교를 듣는 성도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던지는 질문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정말 세상의 결산서와 같은 기준으로 판단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생을 채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 채점 방식에 놀라울 만큼 냉정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은 사람과 흙(땅)을 저주하셨고, 그 땅이 내는 소산은 가시와 엉겅퀴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가치를 쌓고 힘을 키우는 일은 저주받은 땅에서 저주받은 인간이 벌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조차 이 저주받은 땅의 숫자, 곧 많고 적음과 있고 없음으로 자기 인생의 성패를 가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온 뒤 새로운 생존법을 찾았습니다. 바로 연합입니다. 바벨탑 이야기가 그 장면입니다. 힘을 모으고 수를 불려서 번영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로 바꾸면 '생육과 번성', 곧 양적 팽창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생육과 번성은 본래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육'(파라)은 열매 맺음이고 '번성'(라바)은 그 사역의 완료이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창조 사역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일을 제 힘으로 해내려고 합니다. 서로 미워하던 사람들도 자기 안위가 걸리면 쉽게 손을 잡고, 다수가 가는 길을 곧 옳은 길로 여깁니다. 하나가 되자, 성공하자, 번영하자, 사람의 선과 지식의 체계는 대체로 이 구호 아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이런 인간의 모습을 담은 단어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 입니다. 이 단어에는 두 어근의 뜻이 겹쳐 있다고 봅니다. '다가'는 알을 낳아 수가 많아진다는 뜻이고, '다아그'는 두려워하고 근심한다는 뜻입니다. 물고기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연어는 한 번에 수천 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렇게 낳아야 살아남는 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정어리나 멸치는 수천수만 마리가 빽빽한 떼를 이루어 헤엄칩니다. 떼 속에 있어야 포식자의 눈을 피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많이 낳고 모여 다니는 모습은 약육강식의 바다에서 두려움을 이기려는 몸부림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을 읽었습니다. 두려움에 쫓겨 수를 늘리고 연합하여 번영하려는 사람이 곧 물고기라는 것입니다. 한 해를 결산하며 숫자에 울고 웃는 사람의 얼굴이 이 물고기의 얼굴과 닮아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알로 번식하는 것을 부정한 출생, 곧 란(卵) 태생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모든 생명이 란 태생입니다. 포유류도 어머니의 양수라는 '알' 속에 있다가 그것이 터지면서 세상에 나옵니다. 결국 모든 인생이 부정한 알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시골 닭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암탉이 낳은 달걀은 겉으로 멀쩡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병아리가 되지 못합니다. 암탉이 스무 날 남짓 날개 아래 품어 줘야 비로소 껍질이 깨지고 새 생명이 나옵니다. 아무리 소중한 알이라도 품는 온기 없이 두면 알로 머물다 끝납니다.

성경에서 이 '품다'(라하프)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바로 그 단어입니다. 혼돈과 어둠의 바다가 성령의 품에 안기자 창조가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우신 것도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원치 않았다는 것은, 나는 이미 살아 있는데 왜 거듭나야 하느냐는 항변입니다. 날개 아래 품기기를 거부하는 알은 영영 알로 남게 됩니다.

이 그림은 결혼의 그림과도 이어집니다. '날개'와 '옷자락'은 같은 단어입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하고 청한 것은 결혼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신랑이 옷자락으로 신부를 덮으면 혼인이 성립합니다. 그러니 역사 전체는 하나님이 은혜의 옷으로 부정한 신부를 덮으시고, 그를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로 끌어올리시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치 속의 애벌레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애벌레는 고치 속으로 들어가 자기 몸이 녹아내리는 시간을 지납니다. 애벌레의 처지에서 보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고치가 깨어지는 날 거기서 나오는 것은 더 큰 애벌레가 아니라 나비입니다. 애벌레가 자라고 성숙해서 나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해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어부들이 밤새 그물을 던지고도 빈손으로 돌아와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가르치신 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시몬은 말합니다. "
선생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러자 고기가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고, 두 배에 가득 채웠더니 배가 잠기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십니다.

흔히 이 이야기는 "
내 힘으로는 안 되어도 말씀에 순종하면 그물이 찢어지도록 채워 주신다"는 교훈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본문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먼저 이름을 보면, '시몬'은 광야, 사막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물이 없고 말씀이 없는 자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입니다. 반석에서는 생수가 터져 나옵니다. 광야였던 사람이 반석이 되고, 물고기를 낚던 사람이 사람을 낚게 되는 이야기가 이 본문의 뼈대입니다. 물고기를 낚아 올리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저주의 바다에서 살아 있는 줄 알던 자를 건져 올려 죽이고, 다시 살려내겠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밤이 맞도록'은 모든 밤 동안이라는 뜻입니다. 하룻밤이 아니라 어둠의 시간 내내라는 말입니다. '수고하다'(코피아오)는 부여된 노동, 곧 율법적 수고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부의 하룻밤 고생이 아니라, 말씀 없이 제 열심으로 어둠의 시간을 건너려던 인간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했더니 고기가 가득 잡힌 것은 무엇입니까? 그때는 성령이 오시기 전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해 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은 따라 할 모델이 아니라, 성령을 받기 전의 인간이 자기 열심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가 잡은 것은 물고기, 곧 연합과 번성과 확장의 상징인 '다그'였습니다.

이 본문에는 배가 두 척 나옵니다. 성경 전체에서 '배'는 두 종류로 나옵니다. 하나는 인간의 유익을 위해 장사하는 배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로 사람을 살리는 방주 같은 배입니다. 장사하는 배의 대표가 요한계시록 18장의 바벨론입니다. 상인들과 선장들이 바벨론으로 치부했다가 한 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울부짖습니다. 이 배의 상품 목록에는 사람의 영혼까지 들어 있습니다. 이는 세상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성도와 성도인 척하는 자에게 주어진 책이므로, 이 배는 교회 안에 다른 모양으로 있는 가짜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시며 "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와 같습니다. 장사는 자기의 노력과 수고로 자기 유익을 구하는 일인데, 성전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 48편 7절의 '다시스의 배'도 장사하는 배입니다. 하나님은 이 배를 부수시고 은혜의 성,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영히 견고하게 하십니다. 이 대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책이 요나서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구원의 말씀을 들고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
저런 자격 없는 자들을 왜 구원하십니까" 하며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자격을 따지는 마음, 곧 율법주의의 배입니다. 그 배는 풍랑을 만나고, 하나님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 스올의 자리까지 내려가게 하십니다. 사흘 뒤에 그가 나오자 구원받을 이유가 전혀 없던 니느웨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예수께서 '요나의 표적'이라 부르신 십자가의 모양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같은 그림입니다. 노아가 자격이 있어서 방주에 오른 것이 아니라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두 배를 하나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본의 배, 율법의 배는 사람을 죽이고, 은혜의 배는 자격 없는 사람을 거저 살립니다.

수영 대회 금메달리스트도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던져지면 헤엄쳐 육지에 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잘 젓고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방향과 거리가 맞지 않으면 그 수고는 헛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바다에서 누가 더 힘껏 노를 젓는지를 두고 서로 점수를 매기며 한 해를 보냅니다.

본문은 그물이 '찢어졌다'고 번역했지만, 그 단어(디알흐레소)는 조각조각 부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터졌다는 말이 아니라 그물이 조각조각 나서 쓸모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성경을 읽는 방식에 빗대어 볼 수 있습니다. 퍼즐을 떠올려 보십시오. 퍼즐은 한 장의 그림이 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각 하나만 쥐고 "
이 조각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만 잘 지키면 상을 받는다"고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조각은 그림 전체와 떨어져 오히려 사람을 얽매는 규칙이 됩니다. 성경이 그렇게 읽힐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조항으로 쪼개어 놓고,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읽기입니다. 신명기 28장의 복과 저주를 인간의 행위 점수표로만 읽으면 율법이 조각조각 쪼개져서 도덕과 처세술이 됩니다. 그 그물로는 물고기밖에 건지지 못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 그물을 말합니다. 잠언은 잘못된 말이 사람을 그물에 걸리게 한다고 하고, 전도서는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할 때 사람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 같다고 합니다. 하박국은 사람을 바다의 물고기에 빗대어, 하나님이 그물로 모두 거두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누구나 선악과를 물고 이 땅에 오는 물고기인 셈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치시는 그물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바다에 치는 그물에 비유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마 13:47)

여기서 '그물'(사게네)은 '갖추어 놓은 기구'를 뜻하는 말로 풀이되고, 이는 성전의 떡상, 촛대, 번제단처럼 복음을 보여 주는 기구들을 연상시킵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함께 걸렸다가 마지막 때에 가려집니다. 같은 말씀을 같은 자리에서 듣고도 그것을 행위와 윤리, 규범으로만 받아들이면서 "
나는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도 같은 그물에 걸려 있지만 엉뚱한 그물, 곧 율법의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갈릴리의 시몬은 어떻게 했습니까? 말씀하신 예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다른 배의 동무에게 손짓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애굽 앞에서 자기 힘으로 벗어나 보려고 다른 나라에 원군을 청하던 모습과 똑같습니다. 그러다가 두 배가 모두 '잠깁니다'. 이 단어(뿌띠조)는 만선으로 무거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라앉아 빠졌다는 뜻입니다. 배가 바다에 빠지면 끝입니다. 시몬은 한 마리도 건지지 못한 채 알몸으로 나와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어떤 사업가가 있습니다. 그는 십 년 동안 성실하게 일했고 사업은 번창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열심이어서 "
하나님이 복 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거래처가 무너지면서 그의 사업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집과 사무실이 넘어가고, 쌓아 올린 신용과 이름도 사라졌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빈 사무실에서 짐을 쌀 때 남은 것은 낡은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그 성경을 '자기를 위한 책'이 아니라 '자기를 고발하는 책'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처음으로 예수가 보였습니다. 이것은 갈릴리의 시몬이 겪은 일과 닮아 있습니다. 시몬은 가진 것을 다 잃은 자리에서 "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엎드렸고, 예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복을 받아서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고기를 한 번 더 잡게 해 주는 분이라서 따라간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물고기나 잡던 광야의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수이신 예수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같은 호숫가에서 다시 그물을 내리게 하셨을 때, 그는 더 이상 "
나는 죄인입니다"라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행동이 갑자기 훌륭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그의 존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였습니다. 시몬이 베드로로 변해 가는 이 과정이 곧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에 보리떡과 물고기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서 풀립니다. 보리떡은 율법에서 간음한 여자가 의심의 제물로 드리던 떡이고 짐승이 먹는 양식입니다. "
하나님, 제가 짐승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부정한 자입니다.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드리는 떡입니다. 물고기는 앞에서 보았듯 연합과 다산과 자아실현을 꿈꾸는 율법 아래의 아담입니다.

예수께서 그 보리떡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물고기가 되셨습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먹히셨습니다. 기독교는 떡과 물고기를 더 많이 얻는 종교가 아니라, 그 떡과 물고기가 되어 죽으신 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키우고 다듬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 자아를 죽이셔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고치 속에서 애벌레가 죽어야 나비가 나오듯이 말입니다.

이제 식탁 앞의 가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가 같은 통장과 같은 일정표를 펼쳐 놓고도 이전과 다른 결산을 한다고 합시다. 사업이 기울고 병원비로 마음고생을 한 가장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올해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런데 내가 예수 없이는 한 걸음도 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올해만큼 분명하게 안 해도 없다." 이것을 두고 성도의 눈으로는 '성공한 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승진하고 집을 산 가장도 자기 숫자를 근거로 자신을 높이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내가 쌓은 것이 아니다. 그래도 내가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성도의 결산서에는 칸이 하나뿐입니다. "
나는 정말 예수 없이는 안 되는 사람이다." 이 고백이 올해 얼마나 더 분명해졌습니까? 성도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고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이 인생이라는 광야는 그 승리와 성공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지를 삶으로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모세는 이 인생을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9~10) 기쁜 일이 있어도 며칠 가지 않고, 곧 또 다른 눈물과 걱정이 찾아옵니다. 야곱도 130년의 나그네 인생을 두고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십자가가 보이고 예수의 피가 소중해집니다. 주판알을 튕기며 잘 살았다 못 살았다 따지는 일은 이제 내려놓아도 됩니다.

물고기나 잡던 광야의 시몬이 말씀을 이해하는 반석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세워졌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사람을 낚는 일입니다. 그렇게 불러내신 하나님을 찬송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성도는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