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5장 5~11절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김 집사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뜹니다.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지난밤 수면의 질을 점수로 알려줍니다. 82점, 어제보다 3점이 올랐습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물 한 잔을 마시고, 유튜브에서 본 '장수 습관 10가지'를 다시 떠올립니다. 간헐적 단식, 하루 만보 걷기, 오메가3 챙겨 먹기, 그의 서재 책상 위에는 "100세 시대를 준비하라"는 제목의 재테크 책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그와 닮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시간을 계산하며 눈을 뜹니다. 오늘 하루를 얼마나 알차게 써야 하는지, 이번 달 목표는 얼마나 달성했는지, 노후 자금은 얼마나 모였는지, 우리는 시간을 마치 통장 잔고처럼 여깁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장수한 사람'이라 부르고, 적게 가진 사람은 '요절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더 풍요롭고 길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평생 달립니다. 2011년에 개봉한 영화 '인 타임'을 본 사람이라면 이 그림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 속 세상에서는 시간이 곧 화폐입니다. 사람들은 팔뚝에 새겨진 디지털시계에 남은 시간으로 커피 한 잔(4분), 버스 요금(2시간), 월세(한 달치 시간)를 지불합니다. 시계가 0에 도달하면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춥니다. 그래서 이 영화 속 사람들은 절대로 뛰지 않고 걷는 법이 없습니다. 잠도 마음 놓고 못 잡니다. 자는 사이에도 시간, 곧 생명이 줄줄 새어나가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이 영화 하나로 우리 시대의 민낯을 정확히 그려냈습니다. 우리 역시 시계 밥을 다 써버릴까 봐 두려워하며, 오늘도 무언가를 위해 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 그림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첫 단어 '레시트'는 히브리어로 '시간의 시작'을 뜻합니다. 신기하게도 요한복음의 첫 문장도 같은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맨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그 열렸던 시간이 다시 하나님께 몰수당하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간이 열렸다가 결국 닫히는 것, 이것이 성경이 그리는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이미 서른 살의 몸으로 눈을 떴다면, 그리고 평생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면, 그에게 '나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있을까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아기로 태어나 자라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인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설정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발전하고 성숙해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즉시 완성되는 곳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완성된 세계에는 애초에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완전한 것은 더 나아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나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즉 하나님처럼 되어보려 한 그 순간부터 인간은 늙기 시작했습니다. 성숙과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성숙이 젊음이 아니라 노화를, 발전이 아니라 부패를 동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을 펼쳐보면 낯익은 족보 사이사이 같은 문장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가 죽었더라." 몇백 년을 살았던 이들도, 결국 예외 없이 그 문장으로 삶이 마무리됩니다. 시간을 쌓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던 인간의 시도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창세기 5장은 담담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어느 작은 개척교회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매달 재정 때문에 잠을 설쳤습니다. 성도 수는 늘지 않았고, 통장 잔고는 늘 바닥을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학교 동기 목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동기는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어때? 힘들지?" 하고 묻는 그 목소리에는 은근한 우월감이 배어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가, 아니면 성공이라는 떡을 먹고 사는가?'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 모두가 이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사십 년 동안 겪은 일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에서 구원받아 홍해를 건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광야에서 계속 주렸습니다. 이 굶주림은 밥이 없어서 겪는 굶주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하늘에서 만나가 매일 내려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렸습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이 수수께끼를 풀어줍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만나를 입에 넣으면서도, 그 만나가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굶주림, 이것이 광야의 굶주림이었습니다.
이 굶주림은 오늘날 예배당 안에서도 똑같이 벌어집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에게 성경은 대체로 '착하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새벽기도를 나갑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면, 그 모든 헌신을 통해 은근히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이만큼이나 하나님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떡'으로만, 즉 내 삶의 에너지원으로만, 여기는 신앙의 초보 단계입니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이용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 자체가 내 생명이라는 자리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광야로 이끌려 가셔서 사십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극도로 허기진 그 순간, 마귀가 찾아와 세 가지를 제안합니다(눅 4:1~13).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가지 제안이 모두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복음의 핵심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의 제안입니다. 다만 딱 하나, 방향이 살짝 틀어져 있을 뿐입니다.
첫째,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성경은 예수님을 종종 '돌'로 묘사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 산 돌, 그 돌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주어지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마귀는 이 복음의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어를 슬쩍 바꿉니다. "너를 위해" 그 능력을 써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 사업이 잘 풀리고 인간관계가 회복되자, "역시 예수 믿으니까 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성공시켜주시는구나"라고 결론짓습니다. 복음이 성공을 위한 도구로 축소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복음은 내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는 영양제가 아니라, 나를 통째로 하나님께 의탁시키는 사건입니다.
둘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천사들이 너를 받쳐줄 것이다." 마귀는 하늘 보좌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뛰어내리셨다'는 사실인, 오늘날 우리가 성육신이라 부르는 그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 "당신이 정말 믿음이 좋다면 기적을 한번 보여주시오"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증명하는 삶 대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채로 조용히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정말로 떨어져 죽으셨을 때, 천사는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셋째, "내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받은 자가 되어 죽으실 것을 마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목적지를 이 땅의 성공과 권력으로 슬쩍 바꿔치기합니다. 이 유혹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형통해진다"는 메시지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답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세 가지 시험을 통과하신 예수님의 삶을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아무도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주지 않았고, 세상적 성공의 증거도 하나 없었습니다. 그저 십자가에서 조롱당하며 죽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실패자를 교회의 머리,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누가는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연이어 배치합니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장면입니다(눅 4:16~30). 그날 예수님은 이사야의 희년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희년이란 종이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정해진 때가 되면 풀려나는 제도입니다. 종이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약속 그 자체 때문에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은혜의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했다는 그 기적을 여기서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반응을 오늘날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에서 강사 목사가 "예수님을 믿으면 참 자유를 얻습니다"라고 설교했더니, 청중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이렇게 묻는 상황입니다. "그럼 제 사업 대출도 좀 해결해 주시겠습니까? 다른 교회에서는 그런 기적도 일어났다던데요." 은혜의 메시지가 순식간에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로 뒤바뀌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반응에 대해 구약의 두 사건을 상기시키십니다.
첫째는 엘리야 시대입니다. 삼 년 반 동안 하늘이 닫혀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 안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그 누구도 도움받지 못했습니다. 오직 시돈 땅 사르밧의 이방인 과부 한 사람만이 엘리야를 통해 살아났습니다(왕상 17장). 이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으로 떡을 해 먹고 죽으려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마지막 한 줌마저 먼저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자기 것을 완전히 내려놓은 그 집에, 통의 가루가 마르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반면 화려한 성전을 자랑하던 예루살렘은 정작 그 기근에 무너져갔습니다.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 열심히 제사 지내고 율법을 지키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도리어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 "저는 이제 끝났습니다. 도와주지 않으시면 죽습니다"라고 인정한 이방인 과부에게는 그치지 않는 양식이 부어졌습니다.
둘째는 나아만 이야기입니다(왕하 5장). 이스라엘 안에는 나병 환자가 많았지만 아무도 낫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율법을 열심히 지키며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밖의 이방 장군 나아만이 "나는 나병 환자가 맞습니다, 고쳐주십시오"라며 찾아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반면 "저는 끝장난 사람입니다"라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임합니다. 나사렛 회당 사람들은 바로 이 진실, "당신들도 사실 저 이방 과부, 저 이방 나병 환자와 똑같은 처지다"를 듣는 순간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을 밖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어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다만 아직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아니었기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사건 바로 다음에 또 하나의 장면을 배치합니다. 회당 안에서 발견된 '귀신들린 사람'입니다(눅 4:31-37). 원어를 살펴보면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더럽혀지고 왜곡된 영(말)'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것을 흉내 내며 인간을 위해 왜곡시킨 말입니다. 이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칩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러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흥미로운 것은, 귀신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그 반응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떠나소서."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와 상관하기를 거부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귀신들림'의 본질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보다 더 인상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입니다(막 5장). 그는 무덤가에서 살면서 스스로 자기 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열심히는 살고 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옭아매고 파괴하는 삶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성공을 위해 건강도 관계도 다 갈아 넣으면서 정작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귀신은 이번에도 "떠나소서"라고 외치면서, 대신 근처의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왜일까요? 돼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짐승, 즉 사람들이 힘과 재산으로 여기던 것을 상징합니다.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는 그 마을에 엄청난 경제적 자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자기 생존의 근거로 삼고 있던 바로 그것인 돼지 떼를 물속에 수장시키심으로써, 그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왔는지를 폭로하십니다.
그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자기 재산을 잃은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 몰려가 "제발 우리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막 5:17). 자신을 살리신 분보다 자기 재산을 더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우리 삶의 '돼지 떼'인 우리가 붙들고 있는 안정, 명예, 성취를 조금이라도 건드리시면, 곧바로 "왜 저에게 이러십니까"라고 항변하곤 합니다. 그것이 폭로되는 순간이야말로, 사실은 우리가 진짜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는 로마서 5장이 말해줍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예수님은 낭떠러지에서 밀려나실 수도 있었던 그 자리,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던 그 시험의 자리를 결국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밀어낸 원수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진짜로 떨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살아나신 예수님이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김 집사의 이야기에서 그가 스마트워치의 수면 점수와 노후 자금 계산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 부지런히 건강을 관리하거나 더 많은 돈을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르밧 과부처럼, 나아만처럼, "저는 제 힘으로 제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인정하는 자리에 서는 데 있습니다. 그 인정의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시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처럼 자기 힘으로 무언가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는 자리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밀가루 한 줌뿐인 사렙다의 빈집처럼 "주님이 아니면 저는 오늘이라도 끝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딛고 설 반석입니까? 반석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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