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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로마서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1.

로마서 5장 8~11절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몇 해 전, 한 신문에 훈훈한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수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한 대형 사찰의 주지 스님이 이웃한 성당의 신부를 찾아가 성탄 선물로 난 화분을 건네는 장면이었습니다. 기사에는 두 성직자의 말이 실려 있었습니다. 스님은 "
부처와 예수, 마호메트가 세상에 오신 뜻은 결국 같을 텐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아집과 편견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 같다"고 말했고, 신부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더 나은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화답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듬해에 서로의 말씀을 나누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기사를 읽은 많은 이들이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했습니다. 종교 간의 다툼이 사라진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훈훈함 뒤에는 지나쳐서는 안 될 질문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더 나은 인간'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일까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탄절은 인류애의 축제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방문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잠시 한 응급실의 풍경을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깊은 산속 야영장에서 한 남자가 독사에게 발목을 물렸다고 합시다. 그는 통증과 함께 점점 마비되어 가는 다리를 붙잡고 절규합니다. 이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건강 강연이 아닙니다. "
평소에 등산화를 잘 신었더라면" 하는 반성문도 아닙니다. 그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정확히 그 독의 성분을 상쇄하는 항독소, 곧 해독 혈청을 몸에 주입받는 것뿐입니다. 그것도 시간을 다투는 일입니다. 물린 사람이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없다는 것, 그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독이 조금도 옅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이 상황의 핵심입니다. 오직 밖에서 들어오는 해독제만이 그를 살립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인류 전체의 상황을 정확히 이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민수기 21장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실제로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이상한 처방입니다. 뱀에 물렸는데 왜 또 다른 뱀의 형상을 만들어 걸어 놓으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서 놋과 주석은 심판을 상징하는 금속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게다가 놋은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들겨야만 원하는 모양이 나오는 재료입니다. 다시 말해 장대에 걸린 그 놋뱀은 '심판을 받아 형벌을 다 받은 뱀'의 형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그분을 잡으러 온 무리의 손에 횃불과 몽치가 들려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로 그 심판받은 뱀의 자리에, 우리 대신 매달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미리 이 사건에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저 유명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이처럼'이라는 말은 막연한 감탄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앞의 놋뱀 사건을 가리킵니다. 자기 아들을 심판받은 죄인의 형상으로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죽일 만큼, 그것이 '이처럼 사랑'의 실체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놋뱀을 쳐다보고 산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건강하게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뱀에게 물린 사람만이 그 놋뱀을 바라보았습니다. 멀쩡한 사람에게 놋뱀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핵심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나를 살리는 능력이 되려면, 나는 먼저 "
나는 죽었다. 나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한 부부를 예로 들어보면, 오랜 세월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 온 이 부부는 겉으로 보기에 흠잡을 데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 사이에 깊은 갈등이 터졌습니다. 그 갈등의 근원을 들여다보니, 두 사람 모두 마음 깊은 곳에서 "
나는 이만큼 노력했으니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도, 헌신도, 서로를 향한 배려도 결국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속삭인 말의 본질입니다. "너희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스스로 신이 되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마음, 그것이 곧 인간 안에 있는 뱀의 정체입니다.

민수기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뱀에게 물리기 전,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이렇게 원망했습니다. "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자신을 심판자의 자리에 놓고 하나님을 종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 자신이 뱀에게 물렸을 때, 비로소 진짜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여 범죄하였나이다.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하소서." 이 고백 안에 숨은 참뜻은 이것입니다. "제가 뱀이었습니다."

말씀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편안하게 위로해 주는 자장가가 아니라, 우리의 실체를 파고들어 폭로하는 불뱀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자부해도,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내가 뱀이었다"는 자리로 끌려 내려옵니다. 이 인정 없이는 십자가도 그저 장식품에 머뭅니다. 자동차 백미러에 걸어 놓거나 목걸이로 걸고 다니는 십자가가, 정작 그 사람의 삶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고 나지 말라고 매다는 부적이 되어 버렸지,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자가 절박하게 바라보는 유일한 생명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얼마나 값비싼 사랑인지 이해하기 위해, 이번에는 다른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백방으로 애를 써도 얻지 못하다가 노년에 얻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만이 어느 낯선 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 낯선 이는 다름 아닌, 오래전 그 아버지의 가정을 파탄내고 그를 원수처럼 대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
내 아들을 내어주어 저 원수를 살리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부모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바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백 세에 얻은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 앞에 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사건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여기서 '독생자'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몇 차례밖에 쓰이지 않는 특별한 말인데,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그 '독생자'와 정확히 같은 단어입니다.

이 사건의 결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을 치려는 순간, 하나님은 그를 막으시고 수풀에 걸린 숫양을 대신 제물로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삭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 결말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날 모리아 산에서 실제로 죽은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린 양 한 마리였습니다. 그 어린 양이 훗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다면, 이삭은 바로 그 어린 양 '안에서' 다시 살아난 셈입니다.

이 그림이 말하는 진실은 아브라함의 헌신이 이삭을 살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날 모리아 산 위에서 죽은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 그의 육신의 헌신과 자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죽어야 할 자리에는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린 양, 곧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서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완성할 수 없었던 그 헌신을,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의 심장에 친히 칼을 꽂으심으로 완성하신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과 나의 신앙의 성숙을 나는 '내 것'이라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앞의 예화 속 아버지가 "
내가 낳은 내 아들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여겼다면 결코 그 자리에서 손을 놓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과정을 보면, 그는 이미 자식을 낳을 힘이 다한 노인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조차 믿지 못해 웃었던 사람입니다. 이삭은 애초부터 아브라함의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 순전한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삭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임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그 앞에서 자신의 자랑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세상의 화해는 대개 이런 순서를 따릅니다. 서로 다투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쪽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합니다. 상대가 그 진심을 확인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화해는 이 순서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우리는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분의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려 했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원수 됨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먼저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사죄의 조건을 다 갖춘 후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 자격도 없는 원수 상태에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정우 스님과 박 신부의 훈훈한 화해의 사진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그날의 화해는 두 성직자가 서로 존중하며 손을 내민 결과였습니다. 대등한 두 인격이 서로를 향해 다가간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화해는 원수인 쪽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심판해야 마땅한 그분이, 그 심판을 자신의 아들에게 대신 지우시고 원수인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부처와 마호메트와 예수가 같은 목적으로 왔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원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대신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응급실 장면에서 뱀에게 물린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해독제를 맞는 것뿐입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인생 계획도, 자존심도, 무엇이든 스스로 해내고 싶어 하던 마음도 모두 내려놓습니다. 오직 살려달라는 부르짖음뿐입니다. 성탄이,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
당신도 노력하면 부처와 예수와 마호메트처럼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격려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이미 물렸고, 스스로는 결코 살 수 없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그러나 저 장대에 달린 이를 바라보라. 그러면 산다"는 초청입니다.

이 복음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는 것, 그리고 "
제가 뱀이었습니다. 저를 살려주소서"라고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고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된 사람은, 이제 더는 자기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계산하며 성탄의 기쁨을 재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심지어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도 참으로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 11절에서 고백한 그 기쁨,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는 말은, 바로 그 자리에서 태어나는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