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5장 10~12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유리창이 깨졌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누가 그랬니?" 교실이 조용해졌습니다. 잠시 뒤 아이들이 하나둘 손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저 아니에요!" "저도 아니에요!" "쟤가 했을걸요!" 그런데 정작 유리창 근처에 공이 굴러다니던 아이도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는 절대 아니에요!" 이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집니다. 어른이 된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이 서늘함에서 시작됩니다.
오래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지 몇 세기 지나지 않아 교회 역사에 두 사람이 나란히 등장했습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입니다. 펠라기우스는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게 살았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가 가르친 신앙은 단순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지만, 사람도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렇다면 노력이 모자란 사람은 중간에 탈락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생각은 알미니우스를 거쳐 웨슬레에게까지 이어졌고, 오늘날 교회 안에도 '열심히 해야 인정받는다'는 믿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전한 사람들은 대개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웨슬레는 새벽마다 몇 시간씩 기도하고 하루 종일 성경을 읽고 전도했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반면 어거스틴은 젊은 날을 방탕하게 보내다 서른이 넘어서야 예수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자기가 얼마나 무너진 존재인지를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점수만 놓고 보면 펠라기우스 쪽이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를 '얼마나 훌륭하게 살았는가'로 가르지 않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사는가를 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되풀이해 말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이미 구원은 이루어졌습니다. 훌륭하게 자란 사람을 골라 건져 주시는 것이 아니라, 원수였던 자를 찾아와 건져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열두 제자와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 제자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물었습니다. "주여, 내니이까?" 이 말은 '혹시 저입니까?' 하고 불안해서 묻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깨진 유리창 앞의 아이들처럼 "저는 아니지요, 선생님?" 하고 확인받으려는 말이었습니다. 가롯 유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 전에도 그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지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로 자기 유익을 챙기려 했다는 점에서, 유다와 나머지 제자들이 얼마나 달랐을까요?
그래서 가롯 유다는 열둘 중 가장 못된 사람이 아니라 열두 제자, 곧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나는 은 삼십에 예수를 팔지는 않았다"며 손가락질할 상대가 아닙니다. 그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유다는 자기가 저지른 일을 깨닫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 돌아가 "저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기 죄를 자기 목숨으로 갚으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죄는 사람의 목숨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 백만 개를 내놓아도 안 됩니다. 은혜 앞에 엎드리는 대신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지키려 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가 던지고 간 은 삼십을 그들은 부정한 피 값이라며 성전 곳간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만지면 예수의 죽음과 관계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나는 아니다"를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고생하던 그들은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조상이 신 포도를 먹었는데 왜 우리 이가 십니까? 공평하게 대해 주세요!"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대답하셨습니다. 의로운 아버지에게서 악한 아들이 나올 수 있고, 그 악한 아들에게서 의로운 손자가 나올 수 있다. 아버지의 의가 아들에게 상속되지도,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대물림되지도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 공평 앞에서 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똑바로 살면 살려 주겠다"는 훈계가 아닙니다. 공평으로 따지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것도 벌을 주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이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도와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비슷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제가 헌금도 열심히 했고 주일도 잘 지켰는데, 왜 하나님은 제게 복을 안 주십니까? 공평하게 해 주세요." 그러나 공평을 요구하는 순간 우리가 얻는 것은 복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에스겔은 이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너는 애가를 지어 부르라." 여기서 애가는 장례식에서 부르는 노래, 곧 장송곡입니다. 사자 새끼 같던 왕들은 애굽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포도나무 가지 같은 왕도 꺾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돌아오라고 바벨론에 보내셨는데, 왕들은 애굽에 도움을 청하고 꾀를 부리며 자기 힘으로 빠져나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왕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너희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 장송곡을 불러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진짜 왕은 누구입니까? 야곱이 유다에게 남긴 유언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으리라, 실로가 오시기까지." 실로는 '진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가짜 왕들이 오고 가며 실패한 끝에, 유다 지파의 사자 되신 예수께서 오십니다. 우리가 먹은 신 포도 때문에 우리의 이가 시어야 하는데, 그 이를 아들이신 예수께서 대신 시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흔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 시작하면 중요한 것이 건너뛰어집니다. 내가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빠진 채 부르는 찬송은 이렇게 들립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찬양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저는 아니지요?"를 노래로 바꾼 것일 수 있습니다. 간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말하는 듯하지만 속은 "나는 열심히 했으니 이렇게 다른 대우를 받았다"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하셨습니다. 먼저 애가를 불러야 위로가 옵니다. "제가 원수가 맞습니다. 제가 예수를 죽인 자가 맞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만 계시록 21장의 약속이 닿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애통은 오래 앓은 병에 놓는 예방주사와도 같습니다. 몸살 백신에 약한 몸살균이 들어 있듯,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부끄러움과 고단함은 원래 우리가 가야 할 자리를 미리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짜 지옥을 예수께서 이미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파도 소망을 붙들 수 있습니다.
어떤 프랑스 영화에 사기꾼이 마을 사람들을 속여 고속도로를 짓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고, 사막 한가운데 길이 쭉 뻗었습니다. 그러나 길은 어디에도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도 끝도 없는 길이어서 족구장으로도 쓸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로 열심히 닦는 길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내가 노력하고 성장해서 예수께 도달하겠다는 길은 어디에도 닿지 않습니다. 길은 예수께서 하늘에서부터 우리에게 내려와 내신 것입니다. 그 길에는 가시와 돌과 담이 있어서 찔리고 부딪히고 막힙니다. 믿으면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장애물을 치우는 일이 아니라, 그 길을 따라 아래로 흘러가며 이렇게 고백하는 일입니다. "제가 이런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길 끝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깨진 유리창 앞에서 "저는 아니에요"라고 외치던 아이들처럼, 우리도 오랫동안 증명하며 살아 왔습니다. 이제 그만 손을 내리고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 말이 우리가 부르는 첫 번째 노래, 곧 애가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른 사람만이 비로소 진짜 찬송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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