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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하늘의 보물, 보물 이야기를 다시 듣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10.

마태복음 6장 19~24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은 "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을 한 번쯤 헌금 시간에 들으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20절입니다. 땅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둑이 구멍을 뚫고 훔쳐 가니,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 은행에 계좌를 만드는 방법이 헌금이라는 설명이 따라붙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분은 봉투를 한 장 더 준비했고, 어떤 분은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이 해석을 끝까지 밀고 가 보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땅에서 재물이 많은 사람은 헌금도 많이 할 수 있으니 하늘에도 많이 쌓게 됩니다. 땅에서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하늘에서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부자가 하늘나라에서도 부자라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질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며 세우신 나라가 정말 그런 곳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
보물"은 우리가 생각해 온 보물과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보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구약이 이 단어를 어떻게 썼는지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33장 6절은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한 것, 곧 여호와를 경외함이 시온의 보물이라고 합니다. 잠언 20장 15절은 세상에 금과 보석이 많지만 가장 귀한 보물은 지식을 말하는 입이라고 합니다. 금과 보석을 한쪽에 놓고 반대편에 입을 놓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언약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신명기 26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
너는 나의 보배로운 백성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보배는 금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 안에 언약의 말씀을 담아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품고 살면서 온 세상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습을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일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43장은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보배라고 불린 백성이 하나님께 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습니다.

이 실패 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감추인 보화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물다운 모습을 끝내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보물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언약의 말씀을 담아 두신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 이스라엘을 통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의 완전한 보물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골로새서 2장 3절도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우리가 하루아침에 금그릇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금이 간 그릇,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그릇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안에 보배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할 일은 그릇을 금빛으로 칠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진 틈으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박물관에 가면 유리 상자 안에 도자기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그 도자기가 값진 이유는 그릇 자체가 반짝여서가 아닙니다. 수백 년 전 누군가의 손으로 빚어져 오늘까지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 그 역사가 그릇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 부엌에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오래된 장독입니다. 모서리가 깨지고 금이 가서 겉으로는 버려도 아깝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십 년 묵은 된장이 담겨 있다고 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장독을 보지 않고 안에 든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방식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쓸모를 높이려고 우리를 닦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배는 안에 계신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담고 있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고 하신 땅의 보물은 무엇일까요? 옷은 좀이 먹고, 쇠는 녹이 슬고, 귀한 것은 도둑이 들어 가져갑니다. 이 땅의 것은 결국 본래의 값을 잃어버립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자기보다 먼저 온 자들은 다 도둑이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도둑과 강도는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율법을 들고 와서 사람을 살리지 않고 오히려 멸망으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땅에서 보물처럼 아끼는 것들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쌓은 도덕, 지켜 온 신앙의 이력,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선행은 우리 눈에는 귀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물이 되지 못합니다. 하늘의 보물만이 진짜 보물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리고 곧바로 눈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보물과 마음과 눈이 한 줄로 이어집니다. 무엇을 보물로 여기느냐는 것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는 문제입니다. 그 눈이 어디서 생겼는지는 산상수훈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서두에서 하늘의 복을 선포하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어디로 흘러갔습니까? 사람에게 보이려는 쪽이었습니다. 기도도, 금식도, 구제도 남의 눈에 띄도록 했습니다. 6장의 앞부분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죄인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의로 자기를 꾸미려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는 뒷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먼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당에 들어서기 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마음과,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내 속을 살피는 마음 중 어느 쪽이 더 자주 일어납니까? 새로 이사 간 집에 손님이 오면 청소부터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는 서랍 속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기 이름이 어떻게 불릴지에는 민감하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아신다는 사실에는 둔합니다.

이 모습은 이미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 "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기록합니다. 먹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먹은 뒤에 부끄러움을 알았고, 곧바로 자기를 가렸습니다. 눈이 밝아졌다고 하니 더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선악과의 결과는 자기 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자기 시각으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4절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흔히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챙기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걸치고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노력을 덜 했거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눈이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는 사람은 자기 기준에 맞는 보물을 따라갑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의 결단이나 훈련 덕분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눈이 온전해졌다는 뜻입니다. 자기 눈으로 땅의 것을 보던 자가, 이제 오직 하늘의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변화를 골로새서 3장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성도의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가 예수님이시라면, 그 보화와 함께 감추어진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우리가 일해서 모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물이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명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짐을 지우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로 눈이 열린 사람이 걸어가게 되는 방향을 일러 주는 말씀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땅의 것, 곧 세상의 욕심과 탐심을 자기 안에서 날마다 밀어내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내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끄십니다.

보물을 쌓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숙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물을 우리 안에 넣어 주셨고, 눈을 열어 그 보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은 그분과 함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좀도, 녹도, 도둑도 거기에는 손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