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시대나 교회는 두 갈래의 흐름 속에서 방향을 잡아가려 애써 왔습니다. 하나는 말씀 중심의 이성과 진리의 길이고, 또 하나는 신비 중심의 감성과 체험의 길입니다. 두 길은 결코 서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며 성숙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사 속에서 이 둘은 종종 충돌했고, 때로는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거나 억눌림으로써 교회의 건강한 균형을 무너뜨려 왔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자각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인 양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신비주의에 기울어 극단적 체험을 진리로 간주하고, 이단적 사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씀주의에 치우친 사람들 역시 체험을 경멸하고 오직 글자 속 진리만을 절대화하면서 냉랭한 율법주의에 갇혀버립니다.
이 둘 모두, 사실은 미성숙의 표현입니다. 어린아이가 걸음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주 넘어진다고 해서 걷는 것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비주의 가운데 나타나는 오류나 말씀주의가 빠지는 교조주의적 위험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문제는 ‘극단’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말씀주의는 본래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과 떨어진 이론 중심이 되면, 복음은 사람을 자유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억압하는 족쇄로 변합니다. 학문적 깊이와 조직신학의 논리적 체계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생명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론에 매몰된 자들은 기도의 자리에서 경험되는 성령의 내적 인도나 감동을 의심하거나 무시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이성 중심의 삭막한 공간이 되며, 감성적 위로와 친밀함을 느끼지 못한 성도들은 떠나고 맙니다. 결국 교회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말만 많고 생명은 없는 껍데기 조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비주의도 그 자체로는 잘못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의 깊은 자리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내적 조명은,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깨닫게 하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체험을 절대화하고 객관적 검증이나 공동체적 분별 없이 나눌 때입니다. 예언과 계시를 쉽게 내뱉고,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감정의 흐름만을 따라 움직이게 될 때, 교회는 요란하지만 중심 없는 나침반처럼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여러 교회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예언 사역이 그 예입니다. 오랜 기도와 분별의 훈련 없이, 즉흥적인 ‘하나님 말씀’을 쏟아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무런 반론이나 검증이 허용되지 않은 일방적인 설교처럼 위험합니다. 성도는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고, 결국 누군가의 ‘말’에 가려 하나님의 말씀은 묻히고 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서로 돕는 배필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신비, 이성과 감성은 서로를 견제하고 보완해야 할 ‘돕는 자’들입니다. 이성이 감성을 억누르면 교회는 냉혹해지고, 감성이 이성을 압도하면 교회는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말했을 것입니다(고전 14:40).
진리는 언제나 균형 속에 있습니다. 말씀의 토대 위에 신비가 서야 하며, 신비의 체험 안에서 말씀은 생동감을 얻어야 합니다. 말씀은 신비의 방종을 막아주고, 신비는 말씀의 교조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말씀 없는 신비는 광기이고, 신비 없는 말씀은 죽은 지식일 뿐입니다.
말씀 사역자와 예언 사역자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분별을 허락하는 구조입니다. 설교든 예언이든,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면 검증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공동체 안에서 열린 토론과 분별을 통해 더욱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자와 예언자, 그리고 듣는 자 모두를 보호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말씀주의’도 ‘신비주의’도 아닌, 그리스도 중심의 균형 잡힌 영성입니다. 이는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신앙이며, 하나님 말씀의 객관성과 성령 체험의 주관성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룩한 조화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두 편을 조화시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서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바에 귀를 기울이되, 성경이라는 분명한 기준을 떠나지 않아야 하고, 성경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성령의 조명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더 이상 무미건조한 교리만 되풀이하는 기관도 아니고, 감정의 기복에 휘둘리는 광란의 무대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건강한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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