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는 원래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물결의 깊이와 바람의 방향을 읽는 일에는 누구보다 익숙했지만, 인생의 방향은 그 자신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낯선 청년이 다가와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베드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3년 동안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며 하늘나라의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 언젠가 세상이 뒤집히고, 자신도 새로운 나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십자가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베드로는 모든 소망을 잃었습니다. “그분이 정말 메시아였을까?”라는 의문이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다시 고향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옛 일터로, 익숙한 그물로,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밤으로. 그날 밤 그는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처럼, 그의 인생처럼,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때 새벽녘, 호숫가에 낯선 한 사람이 서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별생각 없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물이 금세 가득 차 버렸습니다. 끌어올릴 수도 없을 만큼, 큰 고기가 153마리나 잡혔습니다. 그리고도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그는 알아차렸습니다. “주님이시다!"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숫자 “153” 속에 깊은 구속의 메시지를 담아 두셨습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뜻하는 “베니 하 엘로힘”의 문자값을 더하면 정확히 153이 됩니다. 이 말은 호세아서 1장 10절에서 등장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즉,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단지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아들들, 억울하게 죽었던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는 표징을 보이신 것입니다.
구약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아합 왕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아하시아가 병이 들어 바알세불 신에게 신탁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그 길을 막았습니다. 분노한 왕은 엘리야를 잡으러 군대를 세 번 보냈습니다. 첫 번째 50명, 두 번째 50명은 하늘에서 내린 불에 타 죽었습니다. 세 번째 51명은 부장의 지혜로 살아남았지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은 모두 153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의 어리석음과 구조적 죄악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런 죄를 성경은 ‘하타아트’라 부릅니다.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악한 체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동참하게 되는 집단적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신 것은, 바로 이 억울하게 죽은 자들, 잃어버린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회복시키기 위한 상징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억울한 생명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단지 교회의 양육 사명뿐 아니라, 억울하게 잃어버린 생명들을 다시 품으라는 하나님의 회복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순절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성령이 강림하던 날, 베드로가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며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날, 3천 명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 하필 3천 명이었을까요? 출애굽기 32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던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고, 그 죄로 인해 레위 자손이 칼을 들어 3천 명을 죽였습니다. 그때 죽임당한 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에 휩쓸린, 억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3천 명의 피가 오순절에 성령의 불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죽은 자들이 복음 안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구속의 대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멸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하자고 제안했을 때, 예수님은 단호히 꾸짖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슨 영에 속했는지 모르느냐?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살리러 왔느니라.” 이 말씀은 복음의 중심입니다. 주님은 억울한 자를 대신하여 억울함을 짊어지셨고,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누군가는 구조적인 불의 속에서 희생당하고, 누군가는 죄의 책임을 뒤집어쓴 채 조용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명기 27:16). 그리고 “억울함을 참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견디는 것은 아름답다”(벧전 2:19).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눈물을 잊지 않으십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153마리의 물고기 속에, 그리고 오순절의 불길 속에 그분의 회복의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밤새도록 빈 그물만 남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새벽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라.” 그분의 말씀을 따라 다시 한 번 믿음의 그물을 던질 때, 주님은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시키시고,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분이 차려 주신 생명의 식탁에서 우리는 용서를 받고, 회복되며, 다시 부르심을 받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사랑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억울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 상처받은 이웃을 품는 자, 그가 바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베드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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