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한복음 5:8)
예루살렘 성벽 북쪽에는 ‘양 문’이라는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이 문은 제사에 드릴 양을 들이고 내보내는 길목이었기에, 늘 분주하고도 신성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그 근처에는 ‘베데스다’라 불리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연못 주위에는 다섯 개의 기둥 회랑이 있었고, 그 안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눈먼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팔다리에 힘이 없는 사람… 그들의 눈빛은 간절했지만, 어쩐지 차갑기도 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사정을 위로하기보다, 연못이 ‘움직이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물이 한 번 출렁이면 천사가 내려와 치유의 능력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오직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에게만 임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은혜의 집’이라는 이름과 달리, 은혜보다 경쟁과 서두름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38년, 어쩌면 그의 인생 전부였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늘 누군가 앞질렀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나도 언젠가는 낫겠다’는 희망보다, ‘나는 안 되겠구나’ 하는 체념에 익숙해졌을지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의 대답은 조금 씁쓸했습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그는 여전히 연못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38년 동안 그가 믿은 구원의 길은 ‘먼저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집에 있으면서도, 그는 은혜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시선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한마디가 그를 붙들었습니다. 38년 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다리가, 마치 오래 묶였던 줄이 끊어진 듯 풀렸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구원은 내가 먼저 뛰어드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데 있습니다. 내가 준비를 잘 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 은혜가 찾아옵니다. 38년 된 병자가 스스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 그를 일으킨 것입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보고, 종교 지도자들은 불편해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율법 위반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율법 준수가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은혜 자체이신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계셨지만, 그들은 규정 속에 갇혀 은혜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심판을 불러왔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 두 길이 여전히 있습니다.
하나는, 내 힘으로 먼저 들어가려 애쓰는 길로 스스로 노력과 자격으로 은혜를 얻으려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 무력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질문은 단순히 ‘병이 낫고 싶으냐’가 아니라, ‘너는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었느냐’라는 부르심입니다. 은혜는 내가 준비를 마쳤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못할 때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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