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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으로

부득불,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14.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예수를 전해야 하나요?" "왜 그렇게 눈물로 외쳐야 하나요?" 그러나 성경을 들여다보면, 결코 자발적인 열심이나 인간적인 열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직 '부득불'이라는 단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사명자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그렇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겠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였습니다. 수염을 뽑히고, 뺨을 맞고, 조롱받고, 외면당했습니다. 그리하여 차라리 입을 다물고 살고 싶다고 결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뼛속에서 타오르는 불이 되어 도무지 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또다시, 찢기면서도, 울면서도,
“도대체 왜 나만 갖고 그러십니까...”라 하며 복음을 들고 골목과 성읍을 돌며 외쳤습니다. 그는 자의가 아닌, ‘부득불’ 끌려다닌 선지자였고,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로 불립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함으로 끊임없이 쫓겨났습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조차 거짓 사도라고 비난받았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부득불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은 달콤한 열매가 아니라, 겉으로는 매 맞고 안으로는 "너 같은 게 무슨 하나님의 종이냐"는 자기 자각으로 찔림받는 여정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그는 바깥의 핍박보다 자신의 안에서 솟구치는 죄책감과 연약함이 더욱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심으로, 여러 차례 “차라리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라고 고백합니다. 죽고 싶다는 말, 그것은 사명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곁에 있기를 갈망하는 깊은 영적 탄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현실은 고통인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런 기쁨은 가짜입니다. 자기최면에 불과합니다. 진짜 기쁨은 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지속되는 기쁨이어야 하고, 변하지 않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 기쁨은 단 하나, 변하지 않는 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할 때만 가능합니다.

내가 관계하는 대상이 세상의 것이라면, 그 대상의 말 한마디에 내 감정은 기복을 겪습니다. 칭찬을 받으면 기쁘고, 비난을 받으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릅니다. 예수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 있는 기쁨은 언제나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명령이 감정이 아닌 관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란 예수를 붙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세상과의 관계에 기대어 삽니다. 자존심, 명예, 나의 의, 내가 지켜야 할 것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나라는 자아가 움켜쥐고 있는 ‘
’입니다. 히브리어로 자아(自我)란 단어를 풀이해 보면, ‘스스로 자’에 ‘손 수(手)’와 ‘창 과(戈)’가 합쳐져 있습니다. 내 손에 들린 창이 곧 자아입니다. 그 창으로 우리는 나를 지키고, 때로는 말씀 앞에까지 맞서 싸우며, 나를 건드리는 자들을 향해 찌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자아의 창을 뺏습니다. 무장해제시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시고" 라고 번역됩니다. 말씀은 우리 손에서 창을 빼앗습니다. 완전히 무장 해제된 그 상태, 완전히 '없음'이 된 그 자리에서, 성도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성화의 완료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기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더 이상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없게 되는 순간,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부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죽은 자에게 하나님의 것이 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점점 죽어가는 여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은 살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자아를 지키고, 자존심을 보호하며, 자기 명예를 세우기 위해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폐쇄되고, 귀와 눈은 닫혀버립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의 귀를 막고 눈을 가려 아무도 못 듣게 하라.”

왜입니까? 그들 가운데 들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떤 자들의 귀에는, 복음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말씀이 들리는 사람, 그 사람이 참된 성도입니다.

우리 주위에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 맞아...’라고 머리로 동의만 하고, 실제 삶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을 들은 자는, 마음에서 찬송과 통곡이 터져 나옵니다. 탄식과 동시에 은혜에 대한 감사가 솟구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이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기 전, 그는 더 잘 살았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수세식 화장실을 쓰며 부유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러더니 광야로 데려가시고,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삶의 모든 안정감을 빼앗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막벨라 굴 무덤 하나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게 복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땅의 것을 모두 털어내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그 복은 내가 구하지 않아도 은혜로 부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내 것으로 배불러 있으면 결코 그 복을 받아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내 손에 창을 쥐고 나를 지키려 하며, 기쁘다고 말하면서도 금세 무너지고, 복을 구하면서도 복된 자리를 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부득불 끌고 가십니다. 말씀이 나를 찢어서라도 다시 전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죽여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득불, 오늘도 나는 외칩니다. 예수가 생명입니다. 그리고 나는 죽어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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