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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사도행전 - 때가 차매, 알지 못하는 왕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1. 3.

사도행전 7장 17~18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사백 년이 흘렀습니다. 애굽의 왕좌에 새로운 왕이 올랐습니다. 성경은 그를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말 몰랐을까요? 왕궁에는 역사를 줄줄 꿰는 학자와 책사가 가득했습니다. 사백 년 전 한 히브리 청년이 애굽을 대흉년에서 구해 낸 이야기를 그들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아는 것과 알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 왕은 역사를 알았지만, 그 역사를 뒤에서 움직이신 분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철학자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유일한 것은, 인간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새해 첫날 헬스장에 등록하는 사람은 해마다 있고, 그 사람이 다음 해 또 등록하는 일도 흔합니다. 지난해 실패의 경험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큰 병에서 기적처럼 일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처음에는 눈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면 "그때 의사가 잘했지" 하는 말이 입에서 나옵니다. 기적을 보았어도, 큰 경험을 했어도 인간은 하나님을 배우지 못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이스라엘도 사흘 뒤 쓴 물 앞에서 불평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가 충분히 납득하고 설득된 다음에 붙들도록 기다려 주지 않으십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리로 밀어 넣으시고, 거기서 믿음으로 붙들게 하십니다. 암 진단을 받은 날, 사업이 무너진 밤, 아무도 감사할 수 없고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상황은 그대로인데도 나를 주저앉히지 못하는 평강이 있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은혜의 복음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평안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 성도님이 목사님을 찾아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
저는 늘 기쁘고 늘 행복합니다. 그런데 왜 목사님은 행복이 지속될 수 없다고 하십니까?" 목사가 차근차근 물었습니다. "정말 그때도 기쁘셨어요? 그 어려움 속에서도요?" 이야기를 나눠 보니 그는 힘든 일마저 아름답게 칠해서 스스로에게 점수를 주고 있었습니다. 웃는 얼굴로 굳어 버린 것을 평화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
목사님, 저는 선택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늘 불안하고 마음에 평안이 없어요." 목사님은 이렇게 답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생의 끝자락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의 소망을 잃은 적은 없습니다. 바울은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꽉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복잡한 횡단보도를 아버지와 건너는 다섯 살 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는 차 소리가 무서워서 웁니다. 손에 힘이 풀려 놓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이는 안전합니다. 아이가 아빠 손을 쥐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빠가 아이 손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그렇습니다. 내 기분이나 믿음의 세기가 아니라, 역사 한복판에 못 박힌 십자가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우리를 붙듭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가 아빠를 놓친 듯한 순간을 겪게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을 때만 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쌓은 선한 일은 어떻게 될까요?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살인이라고 말합니다. 하얀 셔츠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아무리 나머지가 깨끗해도 그 셔츠는 얼룩진 셔츠로 불립니다. 평생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어느 날 큰 죄를 지으면 사람들은 그 죄로 그를 기억합니다. 우리의 착한 일도 마찬가지로, 사랑할 수 없는 우리의 본성 아래 묻힙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 선행을 하나하나 챙깁니다. 카드 포인트 모으듯이 의로움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내밀려 합니다. 그러니 늘 불안합니다. 아무리 쌓아도 모자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한 가지는 반드시 빼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와 종교적 의무입니다. "
이 본문이 내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가?" 하고 읽으면, 성경이 요리책이나 자기계발서로 바뀌어 버립니다.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을 기록한 편지입니다.

사람은 힘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실하던 한 성도님이 사업이 잘되자 어느새 교회에서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일이 너무 잘 풀리자 하나님이 뒷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꾸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시는 것은 벌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시려는 복입니다.

좁은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길이 곧 좁은 문은 아닙니다. 좁은 문은 자기 부인, 곧 "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고 예수 한 분만 붙드는 문입니다. 아무리 큰 고난을 지났어도 "이만큼 고생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예뻐하시겠지"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넓은 문입니다. 용서와 사랑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애써 본 적이 있습니까? 용서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밤마다 그 얼굴이 떠올라 잠을 못 이룹니다. 사실 우리는 용서한 것이 아니라 갚을 힘이 없어서 놔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애써 보다가 어느 날 "나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진심으로 깨달아지면, 나를 아프게 했던 일이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집니다. 용서는 애쓴 결과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른 척한 바로는 결국 열 가지 재앙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약속의 때가 가까워진 그 순간, 야곱의 후손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일흔다섯 명으로 들어온 작은 가족이 이제 노예가 되어 짚도 없이 벽돌을 굽고, 만들면 부서지고 만들면 또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이 구원 역사의 한가운데였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을 때 이렇게 응원합니다. "
조금만 더 버텨라, 곧 하나님이 건져 내신다!" 그런데 왜 내 삶 앞에서는 같은 눈으로 읽지 못할까요? 오늘 하루가 유난히 힘들었다면 "오늘 같은 날은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잠시 접어 두십시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때가 있고, 오늘 이 하루도 그 계획 안에 들어 있습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