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7장 9~15절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정, 종교 지도자들이 빙 둘러앉은 한가운데에 스데반이 서 있었습니다. 교회가 일꾼으로 세운 집사였지만 그날은 피고인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오경을 줄줄 외울 만큼 성경에 밝은 사람이었고, 아브라함 이야기를 시작하자 재판관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삭과 야곱의 차례가 되었을 때 스데반은 그 둘을 훌쩍 건너뛰고 요셉으로 넘어갔습니다. "조상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재판정이 술렁였습니다. 하필 왜 요셉입니까? 요셉은 형들에게 팔린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자기 백성이 팔아넘긴 일이 옛날에도 있었다고, 너희가 바로 그 형들의 자리에 서 있다고 말입니다. 요셉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그림이었고, 예수님도 자기 백성에게 팔리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묻습니다. 꼭 그렇게 아픈 말부터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전도 방법을 가르치는 강의도 많습니다. 먼저 친해지고, 필요를 채워 주고, 고구마가 익었는지 가끔 찔러 보며 때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옆집에 불이 났다고 해 보십시오. 문을 두드리며 "안녕하세요, 날씨 참 좋죠?" 하고 인사부터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먼저 "불이야!" 하고 외쳐야 합니다. 불편하고 무례해 보여도 그것이 그 집 사람을 살리는 말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그랬습니다. 복음은 "너희가 죽였다, 그런데 그분이 너희를 살리신다"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말솜씨가 닫힌 마음을 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가서 이 백성의 눈과 귀를 막으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마음을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닫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전도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빵만 나눠 주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복음 없이 빵만 주면 그것은 선교보다 구제에 가깝습니다. "예수 믿으면 더 맛있는 빵을 주신다"는 말은 돌로 떡을 만들라던 마귀의 시험과 같은 소리입니다.
스데반은 야곱의 가족을 "일흔다섯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 창세기에는 일흔 명으로 나오는데, 스데반은 당시 쓰이던 헬라어 성경을 따랐습니다. 숫자는 다르지만 그가 가리키는 사람들은 같습니다. 요셉을 팔았던 형들의 가족입니다. 이 대목에서 공회원들은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 형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뒤집힙니다. 팔린 요셉이 애굽의 통치자가 된 것입니다. 바로는 자기 손가락에서 왕의 반지를 빼 요셉에게 끼워 주었습니다. 모든 권한을 맡긴다는 뜻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일부러 '치리자'라는 단어를 가져다 썼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온 우주를 맡기셨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 우주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사람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요?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거꾸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랍니다. 갓난아기는 기저귀를 갈아 달라고 울고, 조금 크면 장난감을 사 달라고 조릅니다. 중학생이 되면 새로 나온 게임을 사 달라고 합니다. 아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 달라집니다. 어떻게 해야 부모님이 나 때문에 기뻐하실까를 생각합니다. 어디가 아파도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말을 아낍니다. 부모에게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는 어떤가요? 평생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만 하고, 하나님을 힘과 능력을 대 주는 조력자쯤으로 여깁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알아 가는 것이고, 그만큼 반응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갑자기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은 다메섹 길에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기 전까지 교회를 짓밟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훗날 하나님이 나를 모태에서부터 따로 세우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다메섹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구원은 한 사람씩 우연히 건져 올려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교회를 계획하신 일입니다. 성경을 쓴 사람들은 시간 밖에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내가 남보다 낫고 더 열심히 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오히려 죄입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왜 스데반이 돌에 맞는 자리에 서 있었을까요? 구원받은 사람은 평생 한 가지를 깨달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나는 내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라도 밀어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것이 죄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 자각은 금방 잊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삶 속에서 반복해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자신을 볼 때는 가라앉고, 하나님과 맞닿을 때는 감격하며, 그 감격은 3초쯤 지나면 다시 사라집니다. 늘 기쁘고 늘 평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평안한 척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흉년이 들자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들은 빈털터리 거지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 자리에서 요셉을 기쁘게 해 드릴 무언가를 내놓겠다고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 내 가족을 해쳤습니다. 그 사람이 새 외제 차 한 대를 뽑아 와서 말합니다. "이걸로 용서해 주세요." 용서가 되겠습니까?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목숨 앞에서 무슨 선물이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거기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입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이 자각을 인생 내내 절실히 겪으며 올라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어느 목사에게 오랜 친구가 있었습니다. 평생 예수를 믿었고 기독교 방송 사역에 인생을 쏟았으며, 틈만 나면 기타를 들고 거리로 나가 전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목사는 그가 위로를 구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자기가 한 일을 하나하나 기억해 내어 들려주었습니다.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는데 하나님이 예쁘게 봐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목사는 안타까웠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붙들고 싶어 합니다. 차라리 "나는 무섭다. 무슨 얼굴로 하나님을 뵙겠느냐"고 말했다면 은혜의 복음을 전할 틈이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참된 구원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지옥에 보내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 그분의 손을 한 번만 잡아 보고 싶습니다." 올려 드릴 거룩한 삶이 아니라, 면목 없는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만나고도 바로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곡식 자루에 은잔을 몰래 넣어 도둑으로 몰기도 하고, 형제 하나를 붙잡아 두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짓궂게 굴었을까요? 차라리 몇 대 때리고 끝낼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형들이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죽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눈에 띈 순간 이미 살아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평생에 걸쳐 우리가 예수를 판 자임을 겪게 하십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형들은 두려워 떨며 말합니다. "이제 우리를 죽이려는 것 아닙니까?"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고, 자기가 팔아넘긴 동생이 얼마나 큰 사람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절정입니다. 설교가의 왕이라 불리는 스펄전 목사도 전성기에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를 이렇게 쓰시다가 버리시려는 것 아닙니까?"
말씀이 나를 폭로하면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으로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상처를 대충 싸매며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보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합 왕 때 일입니다. 왕은 전쟁에 나가기 전 선지자 사백 명에게 물었고, 사백 명은 입을 맞춰 "승리하십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미가야 한 사람만 "올라가면 죽습니다" 했습니다. 아합은 "저자는 내게 좋은 말을 한 적이 없다"며 화를 냈습니다. 결과는 미가야의 말대로였습니다. 마음이 편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신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 힘을 목숨을 건지는 데 쓰지 않고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는 데 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비움입니다. 삼위 하나님도 서로를 비우고 서로를 채우십니다. 우리가 채워 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배설물과 같습니다. 그것을 고백하고 "다 비워 주십시오" 하는 것이 은혜를 붙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재미가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서 만족감을 느낄 때는 신나지만, 그 만족감이 사라지면 무기력해집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싶겠지만,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말기 환자에게 "드시고 싶은 대로 드세요"라고 하는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살릴 수 있다고 믿는 의사는 아파도 치료를 다 받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십니다.
결국 두 가지만 남습니다. 나도 오늘 가짜일 수 있다는 겸손, 그리고 그럼에도 하나님이 이끄시면 갈 수 있다는 면목없음입니다. 성큼성큼 가다 넘어지지 말고 살살 가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천국을 향한 열망이 솟는다면, 감사할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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