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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사도행전 - 시약이 떨어지는 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6.

사도행전 7장 9~10절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예루살렘 공회 회의실은 조용했습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는 변명하는 대신 이스라엘의 역사를 차분히 읊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자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자랑스러운 선조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삭과 야곱을 건너뛰고 요셉 이야기로 넘어가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다는 대목이 나왔습니다. 장로들 가운데 눈치 빠른 이들은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차렸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던져진 구덩이는 짐승을 잡으려고 판 구덩이였고, 거기에 둔 것은 죽으라는 뜻이었습니다. 미디안 상인에게 넘긴 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가족 공동체 밖으로 팔려 간다는 것이 곧 생사여탈권을 남에게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이 훗날 굶어 죽기 직전의 형들을 살려냈습니다. 자기를 죽인 사람들이 그의 손에서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
당신들이 바로 그 형들입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회의실은 분노로 들끓었고, 그는 곧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본래 이런 일입니다. 듣는 사람이 "내가 그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도록 거울을 들이대는 일입니다.

어느 동네 수영장에 관리인이 새로 왔습니다. 첫날 수영장 물을 들여다보니 투명하고 반짝였습니다. 누가 봐도 깨끗한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관리인은 물을 눈으로만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작은 병에 물을 떠서 시약 몇 방울을 떨어뜨립니다. 물이 순식간에 탁한 갈색으로 변하면, 맑아 보이던 물이 사실은 산성으로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시약은 물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이미 더러웠던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설교를 이 시약에 견줄 수 있습니다. 설교와 전도는 원어로 같은 단어이니, 이는 목사만의 일이 아니라 삶과 입으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성도의 일입니다. 말씀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도덕과 윤리로 잘 포장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 믿던 이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비유를 "
길가밭이 되지 말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를 뽑아 좋은 밭이 되라"는 훈계로 읽습니다. 그러나 씨가 떨어지기 전에는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씨앗, 곧 말씀이 떨어져야 비로소 "아, 내가 길가밭이었구나, 돌짝밭이었구나, 가시덤불이었구나"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좋은 밭은 무엇일까요? 말씀 앞에서 자신이 영원히 길가밭이고 돌짝밭이고 가시덤불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폭로당하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이 전부시고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자리, 성경이 말하는 상한 심령이 그곳입니다. 돌을 골라내고 가시를 뽑아 스스로 좋은 밭이 되겠다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복음의 그림은 이렇습니다. 엉터리 밭에 좋은 씨가 들어와 죽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한 알의 밀알이라 부르셨습니다. 그 밀알이 엉터리 밭 안에서 죽고, 거기서 열매가 맺힙니다. 밭은 씨 때문에 좋은 밭이 되는 것이지, 밭이 스스로 뒤집혀서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일은 때로 아픕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하고 당부하며, 그 내용을 "경책하라"고 했습니다. 달래라고 하지 않고 야단치라고 했습니다. 어느 건물에서 불이 났습니다. 누군가 복도 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저, 죄송한데, 혹시 시간 되시면 나와 보시면 좋겠어요" 하고 말한다면 그것이 진심일까요? 불이 난 것을 아는 사람은 소리를 지릅니다. "불이야! 나오세요!" 사람들이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다 알아듣는 것 같아도, 정말로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조용히 말하겠습니까?

요나가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단련을 받고 니느웨에 간 요나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
회개하세요, 안 하시면 큰일 납니다" 하고 작게 말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가 성 밖에 앉아 불구경하듯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보이는 사람은 마음을 다잡고 와도 목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말씀이 편안한 위로로만 들린다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본문에는 마음에 걸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면 왜 요셉은 팔렸을까요? 왜 보디발의 아내를 만났고, 왜 감옥에 갔을까요? 술 맡은 관원장이 풀려나서 바로에게 말해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잊어버렸습니다. 요셉은 그 뒤로도 2년을 더 갇혀 있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요셉이 무엇을 했는지는 성경에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셨다면 좋은 경로로 요셉을 애굽에 보내 단숨에 총리로 세우실 수도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구차하고 지저분한 길이었을까요?

우리가 가진 상식과 윤리의 눈금으로는 이 질문에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이 얼마나 추악한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이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를 하나님 편에 선 우리에게 절절하게 경험시키신다고 말합니다. 사망의 증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 세상에서 겪어 보지 않으면,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 모세 앞의 바로, 예수를 판 유다, 하나님은 이들의 악을 방편으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셨다고도 하고 바로가 스스로 강퍅했다고도 합니다. 두 말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래 강퍅하고, 하나님은 그 본색이 드러나도록 사건을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지 않았다고 해서 천국에 갔을 리 없고, 유다가 예수를 팔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받았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묻는 질문은 방향이 틀렸습니다. "
하나님이 어떻게 저런 사람을 도구로 써서 악당을 만드실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거울을 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나로구나. 나는 언제든지 예수를 팔 사람이고,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가 종살이를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고, 시기와 질투 앞에서 동생도 팔 수 있는 사람이로구나."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거꾸로 묻습니다. "내 허락도 없이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버리십니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가르치지 않고 "너는 몸에 좋은 알칼리수"라고만 가르쳐 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자리에 올라선 것입니다. 말씀에 한 번 철저히 부서져 본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형벌이 아니라 복입니다.

어느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산을 자주 올랐습니다. 오르다 보면 지루하고, 먹먹하고, 어지러운 생각이 들고, 고요하고, 가파른 골짜기를 기어오르고, 평지를 만나고, 꽃이 피어 있고, 비와 눈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산을 한 번 오르내리면 그것이 인생 같았다고 합니다. 어느 봄날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눈이 내렸습니다. 봄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은 나뭇가지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습니다. 천군만마처럼 쏟아져 내려와서는, 닿는 즉시 미련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그 모습이 구차하지 않아서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저 눈은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올 수 있습니다. 소멸되어 증발하면 하나님이 끌어올리시고, 그 눈은 새로운 눈으로 다시 쏟아집니다. 만일 눈이 "
난 안 갈래" 하고 가지에 달라붙으면, 그 눈은 거기서 끝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소멸은 불멸을 품고 있지만, 어딘가에 집착하여 끌려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잘난 존재가 되려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끌려 올라가도록 소멸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
그래도 우리가 착한 일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강시 영화에서 강시들이 콩콩 뛰어다니다가 서로 밥을 먹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저 강시는 참 착하다"고 말하는 관객은 없습니다. 이미 죽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살해하는 것이 죄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선입니다. 해적선 안에서 해적들끼리 서로 돕고 구제해도, 그 배는 여전히 도적질하러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이 목사가 젊은 시절 난곡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가정방문을 가면 부모님들 가운데 많은 이가 알코올 중독이거나 지적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판잣집 문을 여는 순간 오물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손님에게 밥을 대접합니다. 한 어머니가 먹다 남은 밥을 담은 그릇을 손에 들고 와서 선생님께 내밀었습니다. 그릇 가장자리에는 고추장과 김칫국물이 말라붙어 있었고, 김치 사이에는 언제 먹다 흘린 것인지 모를 불어터진 밥알이 굴러다녔습니다.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한 대접이었습니다. 그는 억지로 물을 말아 삼켰습니다.

목사는 그 밥그릇이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선행과 거룩의 모습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사야가 우리의 모든 의를 더러운 옷이라 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다는 감사입니다. 은혜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폭로당하고 그 은혜를 붙드는 사람에게서 자기부인이 일어나고, 그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함이 나옵니다.

집을 짓는 도구로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집이 다 지어지면 사람들은 "
집이 멋있다, 건축가가 누구냐"고 말합니다. "그 망치 참 가치 있네"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라는 집을 짓는 망치이고, 톱이고, 못입니다.

이 목사가 어느 날 한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첨단 기술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였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창세기를 읽고 나서 말했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으신 것 같네요." 목사는 대답했습니다. "빙고입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먼지'라는 고백이 나올 겁니다." 그 사람은 흥분해서 반박했습니다. 자기는 다 가졌는데 왜 꼭두각시여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엄지손가락을 들면 큰 도시 하나가 그 뒤로 숨습니다. 그 도시 한구석에 있는 집 한 채를 두고 "
나는 다 가졌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새끼손톱 위 먼지로 우주를 가릴 수 있습니다. 우주를 다 가져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왜 나와 의논하지 않으십니까, 왜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으십니까" 하는 것은 꼭두각시는커녕 먼지가 하는 말입니다.

교회도 은연중에 진화론을 따르고 있습니다. 내가 더 훌륭한 사람으로 진화하고, 그렇게 내가 세상에 영향을 주어 세상도 조금씩 나아진다는 역사 낙관주의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
나는 소멸되어 가고, 내 안의 예수가 드러납니다." 소멸되는 삶에는 버려진 것 같은 시간이 따릅니다. 버려진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과 하나였던 사람에게만 가능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었던 사람은 버려지는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외면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셨고, 곧이어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하셨습니다. 버려짐과 이루심은 서로 어긋나는 두 장면이 아니라 한 사건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에도 하나님의 침묵 같은 시간이 옵니다. 나를 오해하시는 것 같고, 외면하시는 것 같은데도 놓을 수 없는 지긋지긋한 사랑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던 날, 그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가운데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곧 자기가 팔아넘긴 그 예수의 사도가 됩니다. 시약이 가장 철저하게 떨어진 사람이 가장 멀리 가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본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말씀에 폭격당해 "
나는 쓸모없는 산성수로구나" 하고 폭로당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다른 일을 하려 애쓰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면, 애쓰지 않아도 내 안에 계신 예수께서 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들을 천국 백성이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