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7장 1~4절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어느 마을에 오랫동안 존경받아온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엔 정의를 위해 몸을 던졌고, 나이가 들어서는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손길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가 요양원에 들어가던 날, 사람들은 "저런 분이 노년까지 저렇게 곱게 늙으시는구나" 하며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이 잠깐 흐려진 사이 그는 옆자리 노인을 밀쳤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밀침을 당한 그 아흔 노인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내 인격이 모독당했다. 저 사람이 무릎 꿇고 사과하고 이 요양원을 떠나야 한다." 곧 죽음을 눈앞에 둔 두 노인이, 흙으로 돌아갈 날을 코앞에 두고 명예를 걸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 목회자는 오래도록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인간은 아흔이 되어도, 죽음의 문턱에 서서도 자기를 지키려는 그 마음을 조금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는 이 장면에서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를 떠올렸습니다.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은 산헤드린 법정에 끌려와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목숨이 걸린 심문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자기변호로 곧장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창조 언약의 자리에서부터 말을 꺼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붙든 것이 한 개인의 생각이나 종교적 소신이 아니라, 창세로부터 흘러온 하나님의 구속 역사 전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각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총론'을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우리는 신앙의 총론을 알고 있습니까? 주일마다 설교를 듣고, 성경 지식을 쌓고, 이런저런 도덕적 교훈을 실천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을 꿰뚫는 하나의 뼈대인 복음 전체의 그림을 붙들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한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고,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들과의 논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작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몇 가지만 고치면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듣는 이들은 열광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싫어하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능성과 위대함을 증명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에는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도덕적 교훈을 나열하고, "거짓말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를 아무리 강조해도, 그 중심에 인간의 가치 챙기기가 있다면 그것은 각론일 뿐 총론이 아닙니다. 총론은 언제나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왜 이 모든 역사를 시작하셨습니까?
구약의 욥을 떠올려보십오. 그는 자타공인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적이 있습니까, 내가 재물에 욕심을 부린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조차 그의 신실함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한순간에 잃자, 욥은 하나님께 거세게 항변했습니다. 이 항변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정말 자신에게 아무 집착이 없었다면, 무엇을 빼앗겼다고 그렇게까지 억울해했겠습니까? 욥이 지켜온 '의로움'은 사실 그가 붙들고 있던 자기 소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벌거벗기심으로써, 그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 아무것도 아닌 존재, 흙으로 지어진 존재의 자리로 되돌리셨습니다. 욥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결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마음의 화살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있는 상태, 그것이 청결입니다.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독약으로 완벽하게 닦아낸 화장실 바닥이라도, 그 위에 밥을 비벼놓으면 누구도 먹지 않습니다.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밥그릇에 담긴 밥은 조금 지저분해도 여전히 밥입니다. 우리의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채로 아무리 깨끗한 행실을 쌓아도, 그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은 밥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선하게 보여도 본질은 불결한 것입니다. 반면 마음이 하나님께 돌이켜진 자리에서 나오는 행위는 설령 서툴고 부족해도 참된 선이 됩니다.
한 종교 지도자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해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목회자가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소유를 실천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 마음이 가 있지 않은 채로 선하게 보이려는 인간의 자세를 보여줄 뿐입니다." 이 말이 알려지자 거센 항의가 쏟아졌습니다. 존경하는 인물을 모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겨냥한 것은 그 인물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십시오, 은혜를 의지하십시오"라는 말에 유독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유였습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합니다. 자기 힘으로 선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간디도 비슷한 예를 보여줍니다. 그는 노년에 자신이 정욕을 완전히 이겨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극단적 수련을 했고, 이를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부심으로 여겼습니다. 세상은 그의 헌신적 삶 때문에 이런 행적조차 관대하게 넘어가지만, 그 진심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이들 가운데 훗날 권력을 잡고서 오히려 부패로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같은 진실을 말해줍니다. 정의를 외치던 진심의 8할이, 실은 자신을 향한 세상의 인정이었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며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세상을 개혁해 올바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이들의 실체를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뿌리는 창세기 1장입니다. 인간은 흙, 곧 먼지에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의 기록 안에는 이미 구속의 전체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신 첫째 날은, 다시는 밤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성취됩니다. 궁창을 만들어 하늘과 땅을 나누신 둘째 날은,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로 연합되는 종말의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바다를 물러가게 하신 셋째 날은, "다시 바다가 없고" 생명나무가 강가에 늘어선 하나님 나라로 완성됩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요한계시록의 새 창조는 하나의 이야기이며, 그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창세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복음의 총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요양원의 두 노인 이야기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조차 자기 명예를 지키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여전히 내 건강, 내 가족, 내 재산, 내 평판을 붙들고 있으면서 "회개했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 돌아서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가 있스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 십일조로 저주를 겁주는 설교, 명당자리를 좇는 관행, 병 낫기만을 구하는 신앙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역시 이 근본적인 자리에서 아직 온전히 돌이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데반은 목숨을 건 법정에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를 진술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듣는 이들에게 진짜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지막 자리는 하나입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저는 이런 존재입니다" 고백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 아니라, 이 정직한 질문 앞에 다시 서는 것입니다. 교회와 나, 오늘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전심으로 돌아보는 것,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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