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도행전 말씀 묵상

사도행전 - 요셉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1.

사도행전 7장 9~10절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아 낯선 땅으로 팔려간 소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소년,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애굽이라는 강대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바로 이 요셉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행 7:9~10)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으며 흔히 요셉의 성실함과 인내를 배우려 합니다. "
요셉처럼 억울해도 참고 견디면 결국 형통해진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면, 문장의 주어가 계속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하나님이 건져내사", "하나님이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이 이야기의 주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입니다. 요셉은 목적어일 뿐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미 이 사실을 노래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앞서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의 시기와 죄악이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넘긴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죄악상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왕좌에 앉아 있었지만, 실제로 나라를 다스린 것은 요셉이었습니다. 왕은 그저 왕 노릇을 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도, 요셉도, 그들 인생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지혜와 능력과 열심을 쥐어짜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대단한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답은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성도의 본분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해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뼈저리게 배우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아는 자들이 비로소 진짜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가?" 이 질문을 좀 더 깊이 따라가 보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언뜻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착하게 살게 하려고"인 것처럼 읽힙니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
선한 일"이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 말하는 착한 행실이라면,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해도 자선을 베풀고 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히려 종교적 헌신이라는 잣대로만 보면, 불교의 수행자들이 그리스도인보다 더 절제되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수준의 선행을 인간에게 만들어 주시려고 독생자를 내어주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요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죄를 짓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욕망과 분노와 이기심을 매일같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와 씨름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행을 보고 감동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을 보고 "저 사람이 저렇게 착한 걸 보니 하나님이 참 훌륭한 분이시구나" 하며 감탄하는 장면을 얼마나 자주 목격하십니까? 오히려 세상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으면, 왜 세상 사람보다 더 착하지 않은가."

여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만약 "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세상의 칭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 칭찬은 결국 우리 자신의 영광이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런 고백이 터져 나오는 순간입니다. "저 사람은 저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저건 분명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이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하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안 되는 걸까요?" 이 문제를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른 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몇몇 강도사들이 담임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강도사란 목사 안수를 받기 직전, 설교할 자격을 부여받은 신학생을 말합니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강해 설교를 백 편 넘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을 만큼 열심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담임목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신비주의나 기복신앙과는 거리를 두고, 로이드 존스와 칼빈의 신학 전통 안에서 개혁주의를 지향하며 성경을 파고드는, 그 나이 또래 신학생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고민은 뜻밖이었습니다. "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받아서 몇 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는데, 요즘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자꾸 낙심이 됩니다.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안 되는 걸까요?" 이들의 고민의 뿌리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으면 그만큼 삶 속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생겼으니, 이제 그 능력을 발휘해서 점점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나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강조했던 성화론의 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틀 안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결국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담임목사는 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
그래서, 됩니까?" 몇 년간 성경을 공부하고 열심히 살려고 애썼던 그들은, 옆 사람의 평가나 시선을 떠나 오직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답해보라는 요청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생겼다는 것은 곧 악을 제어할 능력이 생겼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여전히 발견되는 욕망과 악한 생각들이, 정말 그 능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습니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는데요"라는 대답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철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성숙은, 불교인도 겪고 종교와 무관한 사람도 겪는 일반적인 인격의 성숙일 뿐, 그리스도인만의 특별한 표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악이, 정말 내 안에 있다는 선을 행하는 능력에 의해 언제나 제어됩니까?" 정직하게 답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
선을 행할 능력"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백 가지 계명 중 아흔아홉을 지키고 하나를 어기면 전부 어긴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아흔여덟 개를 지킨 사람과 마흔 개를 지킨 사람에게 등급을 매겨 상을 나누어주는 것이 천국의 상급 체계입니까? 그런 상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이 말하듯, 우리가 쌓은 공력은 결국 불 속에서 시험을 받아 타 없어집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최고의 선행조차, 사실은 태워 없애기 위해 존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단 하나의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결코 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삶 속에서 겪는 자신의 악함과 부족함, 그 초라한 민낯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붙들게 만드는 재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선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
나는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낙관에 빠지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게 됩니다.

비슷한 문제는 다른 자리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새로 등록한 가족들과 나눈 대화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그것으로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늘 들어온 말이었습니다. 자유란 무엇이냐고 되물으니, 대답은 이랬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꼭 안 가도 되고, 헌금을 크게 안 해도 마음이 편안한 상태 같은 것 아닐까요?" 이 대답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 본질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짜 자유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계속 붙들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희망이 손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사람은 그 희망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속이라 부릅니다.

이 역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군대라는 조직입니다. 흔히 남자들이 입대하면 살이 찐다고들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군대에서는 자기 의견을 조금이라도 내세우면 그것이 곧 하극상이자 명령 불복종이 되어 영창에 가게 됩니다. 부조리해 보이는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훈련 계획이 없는 날, 병사들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산에 올려 보내 땅을 파게 합니다. 뭔가 목적이 있는 줄 알고 열심히 파지만, 오후가 되면 그 구덩이를 다시 메우라고 합니다.

또 평소 사격 훈련을 게을리해 실탄이 남아돌면, 상급 부대의 검열에서 훈련 부족이 드러나지 않도록 병사들을 산으로 데려가 허공에 대고 실탄을 다 쏘게 한 뒤 탄피만 수거해 내려옵니다. 효율이나 경제성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병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저 명령에 복종할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지점에서 병사는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조금도 펼칠 수 없는 상태이기에,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부실한 급식을 먹으면서도 살이 찌는 역설이 일어납니다. 자기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유입니다.

신앙의 자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존재가 선의 극치이자 정수라면,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선이고 의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가난한지, 왜 이렇게 배우지 못했는지, 왜 이렇게 명예가 없는지,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분이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믿음 아래 끌려가는 상태,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그것은 내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나를 소유하신 분께 완전히 내어드린 상태입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흔히 "
아버지의 믿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아버지가 자녀를 신뢰하는 그 믿음이 자녀 안에 있는 주관적인 믿음을 이끌어내고 격발시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합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믿음이 나를 끌고 가시는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내가 소유하고 지켜야 할 어떤 감정이나 확신으로 여기면 곧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객관적인 사건에 대한 지식은 우리 안에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자기 확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답지 않게 행동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렇게 흔들리는 그 순간에도, "주님이 이루신 그 객관적인 사역이 결국 나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 그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나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식의 확신이 아니라, "나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나를 끝까지 끌고 가신다"는 고백이 진짜 확신입니다.

이 진리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장면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끝난 뒤, 벌거벗은 채 술에 취해 쓰러져 있던 노아를 그의 아들 셈이 뒷걸음질로 다가가 옷으로 덮어줍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무지개 언약을 통해 "
너희는 본래 악하지만 내가 내 방법으로 너희를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가 오셔서 우리의 그 벌거벗음을 의의 흰 옷으로 덮어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며 물세례를 베풀 때, 세례를 받으러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는 뜻밖에도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부름에 응해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 어째서 이런 거친 말을 던졌을까요? 세례 요한 자신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당시 신발 끈을 풀고 발을 씻기는 일은 노예 중에서도 가장 천한 노예의 몫이었습니다. 유대인 노예에게는 그 일조차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오실 그분 앞에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물세례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훗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물세례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성령세례를 가르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물세례는 왜 필요할까요? 물세례의 본질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이 "
나는 죄인이 맞습니다"라고 인정하며 죄인들과 자신을 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에도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죄인들과 자신을 연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이 물세례, 곧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리를 전제로 삼습니다.

성령세례는 특정한 순간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의 완료 지점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진행 중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는 이미 완료된 것이기에 우리는 "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역사 속 현재의 삶에서 우리를 쪼개어 들여다보면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계속 겪어야 할 것이 바로 물세례입니다. 악한 세상이 홍수처럼 밀려와 그 죄악된 부분을 삼켜버리는 경험, 베드로가 노아의 홍수 사건을 세례의 모형으로 끌어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벗어나지 못했던 죄인의 속성은 다름 아닌 유대주의, 곧 율법주의였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을 결코 놓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한 것은, 예수의 은혜와 십자가 공로와 성령의 세례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는 착각을 완전히 버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이 물세례를 받으러 나온 이유는 결국 자기 구원, 자기 회개, 자기 천국을 챙기기 위해서였습니다.

"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흔히 "천국 가려고요, 회개하려고요, 구원받으려고요"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그 대답 속에서 여전히 주인공은 '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구원과 회개와 천국을 챙기는 일이 아니라, 내가 신앙하는 대상,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대단히 열심 있게 종교 행위를 하고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이지만, 그 모든 행위의 주인공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명령이 뜻하는 바는 "착한 일을 더 많이 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수만 가지 쌓아도 결코 스스로 구원을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이 돌아섬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는 세례 요한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나무뿌리란 우리의 옛 자아를 가리키고, 그 옛 자아로부터 뻗어 나오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미래에 이루고자 하는 온갖 희망들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만큼 성실하고 선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 희망까지도 도끼에 찍혀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겪는 가장 극심한 고통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자존심과 자존감이 하나님의 도끼에 찍혀 "너는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다"라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흔히 고난을 오해합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몸이 병드는 것을 최고의 고난이라 여기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던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태연히 독배를 마셨습니다. 심지어 독이 퍼지기를 기다리며 제자들에게 "예전에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 갚아 달라"는 여유 있는 유언까지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명예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발휘하는 힘은 놀라울 만큼 강인합니다. 그 집요함은 때로 순교조차 마다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와 관련해 어느 분의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하겠습니다. 과거 정보기관에 끌려가, 커다란 항아리 안에 뱀들을 풀어놓은 채 발가벗겨져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독사는 아니었지만 뱀들에게 물렸습니다. 그럼에도 명분을 지키기 위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매달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몽둥이로 맞을 때도, 이를 악물면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육체의 고통을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가 낱낱이 폭로될 때는 전혀 다릅니다. 그 순간에는 통곡하며 바닥을 뒹굴게 됩니다. 육체의 고통은 참아낼 수 있어도, 영혼이 발가벗겨지는 그 고통만큼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할 진짜 고난은 바로 이것, 곧 말씀 앞에서 자기 실체가 폭로되는 고통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
칠 년 대환난"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상상한 시나리오에 성경을 억지로 끼워 맞추곤 합니다. 그러나 도끼로 뿌리가 찍히는 고통, 홍수에 옛 자아가 빠져 죽고 그 위로 새 사람이 떠오르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통과해야 할 세례이며 고난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의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는 밤에 끝까지 등불을 밝히고 서 있던 다섯 처녀들이 그렇고, 백이십 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는 땅에서 배를 짓던 노아가 그렇습니다. "
저 미친 사람이 산 위에다 왜 배를 짓고 있나" 하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이런 사람들은 명성도 평판도 없이 도끼에 찍힌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서 바로 그 미련해 보이는 좌표를 정확히 겨냥하여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고백하게 됩니다. "
저 약함이 사실은 강함이었구나. 하나님이 저 약함 속에 당신의 강함을 채우시려고 그들을 그렇게 두셨구나."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성도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씀의 진짜 의미입니다.

만약 이것이 단순히 "
세상 사람에게 칭찬받는 도덕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았던 간디나 슈바이처 같은 인물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떠난 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칭찬한다면, 그 영광은 우리 자신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게 칭찬받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덮으신 하나님이 칭찬받으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미련하고 무책임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게 끝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덮으신 그 은혜가 종말의 때에 밝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이겨내면 되는 것입니다.

간혹 은수저가 금수저로 변했다거나, 몸에서 금가루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회자되곤 합니다. 그러나 설령 다이아몬드가 쏟아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 신비한 현상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사람은 믿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 신뢰하는 얕은 신앙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것이 참된 성화입니다.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성실함 속에서도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은 계속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성도는 실패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존재입니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
저 사람이 노력해서 정말 변화되었구나"라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정작 본인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실패를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성공하고 계심이 드러납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부끄러운 페이지를 지우시고 대신 이렇게 써 내려가셨습니다.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세상적인 죄악의 낙을 잠깐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나이에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장막 뒤에서 비웃었던 그녀를,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라는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라고 다시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덮으시는 방식입니다.

세상에는 열심히 종교 활동을 하고 착한 일을 많이 쌓아 올리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예수의 은혜를 진심으로 아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리고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볼수록, 이 사실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 가치를 지키려는 본능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중심적으로 왜곡시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이야기를 다시 읽는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요셉의 인내가 아니라 그의 배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성실함이 아니라, 우리를 붙드시고 덮으시고 끝까지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