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7장 12~14절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주일 예배가 끝난 뒤, 팔십을 바라보는 한 권사님이 목사님에게 조용히 다가와 물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누가 누구를 낳고 낳았다는 대목에서 자꾸 졸음이 온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식구가 몇 명이었는지, 아무개가 몇 살에 죽었는지가 구원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많은 사람'이라고 쓰면 안 됩니까?" 그날 본문은 사도행전 7장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요셉이 사람을 보내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명을 애굽으로 청했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권사님의 질문이 사실 모든 성도의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숫자가 그 자리에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야기에 실제 주소와 날짜가 적혀 있으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성경이 전쟁에 나간 병사의 수와 죽은 사람의 나이까지 적어 둔 것은, 이 책이 구름 위의 교훈집이 아니라 땅 위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임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지워 버리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입니다. 물 위를 걷는 일이나 동정녀 탄생 같은 이야기는 과학의 시대에 믿기 어려우니 뼈대만 남기자고 합니다. 그렇게 사건을 걷어 내고 나면 남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도덕적으로 살자는 말뿐입니다. 그들의 글은 읽어 보면 놀랄 만큼 박식합니다. 그러나 결론을 한 줄로 줄이면 '인간답게 살자'입니다.
목사님은 여기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간다움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람이 타락해서 흙처럼 죽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세워 놓고 그 기준에 맞게 사는 것을 인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정말 착하게 살라는 책이라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꾸짖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가장 깨끗하고 열심히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행동만 놓고 점수를 매기면 다른 종교의 선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려는 책입니까? 목사님은 이사야 48장 11절을 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라고 두 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눈에는 이기적으로 보일 만큼 당신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공로가 한 가지도 없게 됩니다. 우리 삶은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를 보여 주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보여 주는 무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작고 약한 자리에서 일을 시작하십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렇습니다. 가인은 힘이 세고 열심도 있었습니다. 제사를 받아 주지 않으신다고 따질 만큼 정성을 쏟았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이름 뜻이 '아무것도 아님'일 정도로 보잘것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벨을 택하셨고, 아벨은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셋이 태어나고 하나님의 계보가 이어졌습니다. 아벨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도 같습니다. 에서는 동생이 돌아오자 달려가 끌어안은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야곱은 아버지를 속인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야곱을 밤새 붙들고 씨름하셔서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그 뒤로 야곱은 절뚝거리며 걸었습니다. 제 발로 뛰어다니던 사람이 지팡이에 기대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모양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도 그랬습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해 교회가 힘과 재산을 얻던 때에,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지키려고 거의 혼자서 교회 전체와 싸워야 했습니다. 다수가 틀렸고 소수가 옳았습니다. 그 뒤로도 교회는 타락하면 누군가가 "아니다" 하고 일어났고,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진짜 교회는 언제나 맞고 쫓기면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 감사하며 살아온 작은 무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목사님은 먼저 '내 교회'라는 말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내 나라, 내 가족, 내 교회를 위해 열심을 내는 마음 밑바닥에는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월드컵이 열리면 평소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던 응원단이 한데 뭉쳐 상대 팀을 향해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 애국심의 뿌리는 결국 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교회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건물이 커지고 사람이 모이면 나를 신앙 좋은 사람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지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해적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해적선 안에서 선원들끼리 아무리 서로 아끼고 섬겨도 그 배가 강도질을 하러 가는 중이라면 그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목적지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웃 사랑의 요령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본문에서, 당시 가장 강한 나라였던 애굽에 하나님은 겨우 일흔다섯 명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백 년 뒤에 그 애굽이 무너졌습니다. 일흔다섯 명이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늘 불평만 했고,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빵 만드는 일을 예로 들었습니다. 큰 밀가루 반죽에 효모를 한 숟갈 넣고 하룻밤을 두면 반죽 전체가 부풀어 오릅니다. 효모는 작지만 반죽 전체를 바꿉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자랍니다. 예수님도 겨자씨처럼 작은 아기로, 말구유에 누운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맞아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죽음에서 수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물을 파 주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선행을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한 방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몫은 아벨처럼 옛 사람이 죽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것이 손해가 아니라 복이라고 했습니다.
시인 김춘수의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저 하나의 몸짓이던 것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된다는 시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실 때 우리가 비로소 존재가 됩니다. 이름을 불러 주셔야 존재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타나시우스가 목숨 걸고 진리를 지킨 것도 그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떨고 있던 그를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일을 꿈꾸고 큰 교회를 세우려는 야망을 조심해야 합니다. 양이 목자에게 자기가 정한 길을 따라오라고 하면 그 길은 파멸로 이어집니다. 교회는 작고 약한 모습으로, 있는 듯 없는 듯 말씀 안에서 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작은 무리를 통해 당신의 큰일을 하십니다.
권사님이 처음에 물었던 숫자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일흔다섯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를 이끌어 오셨다는 증거입니다. 스데반이 이천 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내 구원이나 내 천국을 챙기는 데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이 참된 영광임을 알아 고백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고 아무리 사랑하며 살아도 그것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마지막 한마디를 더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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