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7장 17~18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사백 년이 흘렀습니다. 애굽의 왕좌에 새로운 왕이 올랐습니다. 성경은 그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말 몰랐을까요? 왕궁에는 역사를 줄줄 꿰는 학자와 책사가 가득했습니다. 사백 년 전 한 히브리 청년이 애굽을 대흉년에서 구해 낸 이야기를 그들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아는 것과 알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 왕은 역사를 알았지만, 그 역사를 뒤에서 움직이신 분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철학자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유일한 것은, 인간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새해 첫날 헬스장에 등록하는 사람은 해마다 있고, 그 사람이 다음 해 또 등록하는 일도 흔합니다. 지난해 실패의 경험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큰 병에서 기적처럼 일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처음에는 눈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면 "그때 의사가 잘했지" 하는 말이 입에서 나옵니다. 기적을 보았어도, 큰 경험을 했어도 인간은 하나님을 배우지 못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이스라엘도 사흘 뒤 쓴 물 앞에서 불평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가 충분히 납득하고 설득된 다음에 붙들도록 기다려 주지 않으십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리로 밀어 넣으시고, 거기서 믿음으로 붙들게 하십니다. 암 진단을 받은 날, 사업이 무너진 밤, 아무도 감사할 수 없고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상황은 그대로인데도 나를 주저앉히지 못하는 평강이 있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은혜의 복음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평안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 성도님이 목사님을 찾아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저는 늘 기쁘고 늘 행복합니다. 그런데 왜 목사님은 행복이 지속될 수 없다고 하십니까?" 목사가 차근차근 물었습니다. "정말 그때도 기쁘셨어요? 그 어려움 속에서도요?" 이야기를 나눠 보니 그는 힘든 일마저 아름답게 칠해서 스스로에게 점수를 주고 있었습니다. 웃는 얼굴로 굳어 버린 것을 평화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선택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늘 불안하고 마음에 평안이 없어요." 목사님은 이렇게 답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생의 끝자락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의 소망을 잃은 적은 없습니다. 바울은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꽉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복잡한 횡단보도를 아버지와 건너는 다섯 살 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는 차 소리가 무서워서 웁니다. 손에 힘이 풀려 놓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이는 안전합니다. 아이가 아빠 손을 쥐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빠가 아이 손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그렇습니다. 내 기분이나 믿음의 세기가 아니라, 역사 한복판에 못 박힌 십자가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우리를 붙듭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가 아빠를 놓친 듯한 순간을 겪게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을 때만 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쌓은 선한 일은 어떻게 될까요?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살인이라고 말합니다. 하얀 셔츠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아무리 나머지가 깨끗해도 그 셔츠는 얼룩진 셔츠로 불립니다. 평생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어느 날 큰 죄를 지으면 사람들은 그 죄로 그를 기억합니다. 우리의 착한 일도 마찬가지로, 사랑할 수 없는 우리의 본성 아래 묻힙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 선행을 하나하나 챙깁니다. 카드 포인트 모으듯이 의로움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내밀려 합니다. 그러니 늘 불안합니다. 아무리 쌓아도 모자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한 가지는 반드시 빼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와 종교적 의무입니다. "이 본문이 내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가?" 하고 읽으면, 성경이 요리책이나 자기계발서로 바뀌어 버립니다.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을 기록한 편지입니다.
사람은 힘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실하던 한 성도님이 사업이 잘되자 어느새 교회에서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일이 너무 잘 풀리자 하나님이 뒷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꾸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시는 것은 벌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시려는 복입니다.
좁은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길이 곧 좁은 문은 아닙니다. 좁은 문은 자기 부인, 곧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고 예수 한 분만 붙드는 문입니다. 아무리 큰 고난을 지났어도 "이만큼 고생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예뻐하시겠지"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넓은 문입니다. 용서와 사랑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애써 본 적이 있습니까? 용서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밤마다 그 얼굴이 떠올라 잠을 못 이룹니다. 사실 우리는 용서한 것이 아니라 갚을 힘이 없어서 놔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애써 보다가 어느 날 "나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진심으로 깨달아지면, 나를 아프게 했던 일이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집니다. 용서는 애쓴 결과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른 척한 바로는 결국 열 가지 재앙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약속의 때가 가까워진 그 순간, 야곱의 후손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일흔다섯 명으로 들어온 작은 가족이 이제 노예가 되어 짚도 없이 벽돌을 굽고, 만들면 부서지고 만들면 또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이 구원 역사의 한가운데였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을 때 이렇게 응원합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곧 하나님이 건져 내신다!" 그런데 왜 내 삶 앞에서는 같은 눈으로 읽지 못할까요? 오늘 하루가 유난히 힘들었다면 "오늘 같은 날은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잠시 접어 두십시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때가 있고, 오늘 이 하루도 그 계획 안에 들어 있습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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