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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사무엘상하

사무엘상 - 갈고리에 걸린 은혜, 제사를 멸시한 제사장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6.

사무엘상 2장 12~36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처음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사무엘상 2:30)


어느 오래된 정육점 이야기입니다. 그 정육점 주인은 원래 동네 사람들에게 정직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는 저울을 조금씩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한두 근, 나중엔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손님들은 여전히 그를 믿고 찾아왔지만, 정작 저울 위에서는 신뢰가 조금씩 도둑맞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쯤, 그는 이미 그 거짓에 너무 익숙해져서 자신이 무엇을 훔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사무엘상 2장의 홉니와 비느하스 이야기는, 바로 이 저울 도둑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다만 그들이 속인 것은 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고, 그들이 훔친 것은 고기가 아니라 예배 그 자체였습니다.

한나는 서원한 대로 어린 아들 사무엘을 제사장 엘리에게 맡깁니다. 그 어린아이가 성전에서 여호와를 배워가는 동안, 정작 엘리의 친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12절).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우리는 잘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매일 성막을 드나들며 자란 사람들입니다. 신학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면서도 외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자였고, 속죄제뿐 아니라 화목제, 감사제, 서원제를 주관하는 자였는데, 이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13~17절에 나옵니다. 원래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 레위기 7장에 정해져 있음에도, 그들은 제물로 삼는 중에 있는 고기를 갈고리로 걸어서 가져갔습니다. 심지어 기름을 하나님께 태워드리기도 전에 고기부터 내놓으라 요구했고, 거절하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이 갈고리 장면은 예배당 헌금함에 손을 넣는 사람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갈고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설교를 자신의 명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갈고리, 목회를 생계와 성공의 사다리로 삼는 갈고리, 예배를 자기 만족의 도구로 만드는 갈고리,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아직 태우기도 전에 먼저 자기 몫부터 챙기는 그 습관, 그것이 바로 "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이야기 한가운데, 성경은 어린 사무엘을 비춥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와 대비되어, 어린 사무엘은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고, 한나는 해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를 축복하니 한나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았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사장의 축복이 한나에게 임했다는 것, 이것이 원래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엘리의 두 아들은 백성을 축복하기는커녕 제사를 멸시함으로 자신들뿐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저주를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같은 성전, 같은 시대, 그러나 완전히 다른 두 흐름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무너져가는 제사장 가문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은밀히 예비하신 남은 자의 흐름이었습니다.

캄캄한 시대일수록 하나님은 반드시 한 사람을 남겨두십니다. 온 나라가 부패해 보여도, 온 교회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어딘가에서 세마포 에봇을 입고 조용히 자라는 아이 하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엘리는 자녀들의 악행을 압니다.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한다는 소문이 온 백성 가운데 퍼지자, 엘리는 아들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한다고 책망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21장에 따르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패역한 자식은 돌로 쳐 죽여야 했습니다. 엘리는 그 율법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아버지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엘리 자신의 말입니다. 그는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해 간구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정확한 말입니다.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중재자, 곧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재자인 제사장이 스스로 제사를 멸시하고 있으니, 누가 그들을 위해 중재하겠습니까? 그들 스스로 구원의 통로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무서운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그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여호와께서 이미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원천봉쇄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습관이 된 죄가 사람의 귀를 닫아버린다는 뜻입니다.

알코올 중독이 깊어지면,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말이 더 이상 마음에 와닿지 않는 순간이 온다고 합니다. 듣는 능력 자체가 무뎌지는 것입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처음 짓는 죄는 양심을 찌르지만, 반복된 죄는 양심을 무디게 만들어 결국 책망조차 들리지 않게 만듭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엘리를 책망하십니다. 출애굽 때 레위 지파를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자기들의 음식물을 제물 중에서 받게 하셨는데, 어찌하여 여호와의 처소에서 명령하신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겨 백성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그들을 살지게 하였느냐고 책망합니다.

이어지는 심판의 말씀은 구체적이고 냉정합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를 경멸하겠다 하시며, 엘리의 집안에 노인이 없을 것이고 이스라엘이 복 받는 날 도리어 환난을 볼 것이며, 자녀들이 젊어서 죽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 날에 함께 죽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4장에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던 그날, 전쟁의 패배와 두 아들의 죽음과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비느하스의 아내 역시 그 소식에 갑자기 해산하다가 죽어가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 곧 영광이 떠났다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허공에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말씀이든 심판의 말씀이든, 시간이 걸릴 뿐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 성취는 엘리의 후손 아비아달이 몰락하고 사독이 충성된 제사장의 자리를 잇는 것으로 역사 속에서 이어집니다.

실제로 열왕기상 2장에서 솔로몬은 다윗을 배신한 아비아달을 제사장직에서 파면하는데, 성경은 이것이 바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해 하신 말씀의 응함이라고 못박습니다. 수백 년 전 무명의 선지자가 던진 한 마디가, 결국 왕궁의 정치적 사건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래된 이야기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단에 올리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복음을 전하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홉니와 비느하스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서 제사장, 곧 성도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이들을 눈물로 지적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이며 그 영광은 도리어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배가 신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식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에 배고프고, 인정에 배고프고, 승리에 배고픈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배고픔이 신앙의 언어로 포장될 때가 있습니다. "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 뒤에 실은 자기 성취를 향한 갈고리를 숨기고 있는 경우, 그것이 바로 현대판 홉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을 아주 진지하게 던집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기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경고합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무겁겠느냐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무게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일수록,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무너진 이유는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익숙하게 다루다가 결국 하찮게 여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만지는 성물이 어느 순간 그저 자기 배를 채우는 도구로 전락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위험은 늘 존재합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 매일 읽는 성경, 늘 부르는 찬송이 습관이 되어 그 거룩함을 잃어버릴 때, 우리 역시 갈고리를 든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끝은 절망이 아닙니다. 엘리 집안이 무너진 그 폐허 위에,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겠다고, 그는 여호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최종 성취는 사독이 아니라, 영원히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실패가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신실하심이 오늘 우리를 다시 세마포 에봇을 입은 자로, 갈고리가 아닌 빈손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자로 부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