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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사무엘상하

사무엘상 - 이가봇, 빈 보좌와 참된 영광, 부적이 된 언약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9.

사무엘상 4장 1~22절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사무엘상 4:1~11)


어느 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는 오래된 종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이 종을 울려 하나님께 기도하는 전통이 있었고, 실제로 몇 차례 위기를 넘긴 역사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상한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종을 울리기만 하면 기도의 내용이나 삶의 태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안전할 것이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은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종의 능력을 믿었지, 종을 주신 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4장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왜 졌는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이 성에서 패했을 때는 엎드려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 말기의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게 하셨는고." 이 질문 속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 편에 서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찾은 해법은 방법론이었습니다. "언약궤를 가져오자." 언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심 밖이었고, 언약궤라는 물건 자체가 승리를 보장해줄 부적이라고 믿었습니다.

실로에서 언약궤가 도착하자 이스라엘 진영은 환호성으로 뒤흔들렸습니다. 얼마나 큰 함성이었는지 땅이 울릴 정도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에 관한 소문, 곧 애굽에서 일어난 출애굽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두려움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결의했고, 결국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이스라엘은 보병 삼만 명을 잃었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으며,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이름을 부적처럼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이름이 이방인들 앞에서 모독받는 순간까지 감내하시면서, 하나님은 엘리 집안과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어느 편의 수호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언약대로 일하시는 분이지, 주술이나 미신으로 조종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착각이 반복됩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헌금하고 봉사하고 철야기도를 드린다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준다고 믿는 신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신앙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
내 정성이 부족했나 보다"며 더 큰 종교적 헌신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래이며, 은혜가 아니라 조작입니다.

전쟁의 패배 소식을 안고 한 베냐민 사람이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덮어쓴 채 실로로 달려왔습니다. 엘리는 그때 아흔여덟, 눈은 어두웠고 몸은 비대했습니다. 성 문 곁 의자에 앉아 소식을 기다리던 그는 아들들의 죽음보다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여기서 본문이 사용하는 '
의자'라는 단어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같은 히브리어가 왕의 보좌,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킬 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엘리는 제사장이자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이끄는 자리, 곧 일종의 보좌에 앉아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아들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더럽히고 백성을 착취하는 것을 알면서도 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아꼈던 사람이, 결국 그 자리에서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1960년대 한국 대중가요 중에 '회전의자'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노랫말은 "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라 노래하며,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외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길이 험하기에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짓밟고 올라간다는 그 가사는, 역설적으로 그 자리의 공허함을 고발합니다. 사랑과 진심을 다 짓밟고 앉은 자리라면, 그 자리에 앉는 순간 이미 추락은 예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락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엘리 한 사람의 몰락이 아들들의 죽음, 며느리의 죽음, 나아가 온 이스라엘의 수치로 이어졌던 것처럼, 지도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타협은 반드시 주변 사람들을 함께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의자에 앉아 있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를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의 유익과 자녀와 명예를 지키는 도구로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장의 가장 애절한 장면은 비느하스의 아내의 죽음입니다. 그녀는 해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시아버지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 그리고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한꺼번에 듣고 조산하며 죽어갑니다. 곁에서 돕던 여인들이 "
두려워하지 말라, 아들을 낳았다"며 위로하려 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도, 그 말에 마음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죽어가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가봇, "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녀가 반복해서 언급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언약궤, 시아버지, 남편, 언약궤, 시아버지, 남편, 언약궤. 세 번이나 반복되며 가장 강조되는 것은 언약궤입니다. 그녀에게는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보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 더 깊은 상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심판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얕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절규였습니다.

시편 78편은 바로 이 사건을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양떼처럼 지키셨지만, 이스라엘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반항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실로의 성막을 버리시고, 자기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가봇의 사건은 갑작스러운 비극이 아니라, 오랜 배역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78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영광이 실로를 떠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유다 지파와 시온 산을 택하시고, 양의 우리에서 다윗을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패턴입니다. 심판이 끝이 아니라, 심판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솟아납니다. 사무엘상 5장에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빼앗긴 언약궤가 블레셋 땅에서 홀로 그들의 신 다곤을 무너뜨리고, 결국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이나 지도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영광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하신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됩니다. 엘리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겨 보좌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엘리는 자기 자리를 지키려다 보좌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스스로 비우시고 낮은 자리,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낮아지신 자리가 참된 영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우리는 여전히 회전의자를 꿈꿉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아지는 자리, 사랑과 진심을 짓밟고서라도 올라가야 하는 자리를 영광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가봇의 자리, 영광이 떠난 자리일 뿐입니다. 참된 영광은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옛 언약은 돌판에 기록되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은 우리 마음에 기록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언약궤 같은 부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광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룬 성취, 우리가 앉은 자리, 우리가 지켜낸 명예가 우리의 영광입니까? 아니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그리스도와 함께 낮아지는 것이 우리의 영광입니까? 이가봇이 되어버린 헛된 영광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십자가에 머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하고 참된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