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고, “내가 가는 길은 대로가 아니라 좁은 길이다”, “찾는 이가 적은 길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망생은 많지만 끝까지 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끝까지 갈 사람,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사람을 찾고 계시지만 그분조차도 “찾기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이 그만큼 어렵고 고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그 길이 우리의 육신의 요구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백 살이 되기까지 끊임없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야곱 역시 “내 나그네의 세월이 험악하였나이다”(창 47:9)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이처럼 험악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이 없다면 우리는 도중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게 하시기 위해” 직접 말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부르시는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들의 삶은 하나같이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불행한 결혼을 하며 자신의 삶을 통째로 하나님의 메시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 선지자 하나,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존경받고 풍요롭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선지자들은 치욕과 고통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사야입니다. 그는 제사장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흠이 없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귀를 여시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하셨을 때,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사야는 그때부터 치욕과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그제서야 자신의 죄가 드러났고, 정체성이 밝혀졌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이전보다 훨씬 더 살아 있었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부터 참된 생명을 산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아픔이 큰 법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우리는 수많은 잔소리와 매질을 겪습니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에게, 군대에서는 직속상관에게 가장 많이 혼이 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다루심은 더 섬세하고, 그만큼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요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시기 위해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첫 번째 요구는 늘 죄의 처리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죄를 완전히 끊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죄는 습관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양심이 무뎌집니다. 결국 죄를 합리화하게 됩니다.
불법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 불법을 ‘관행’이라 부르며 정당화합니다. 그렇게 얻은 유익이 많기에 그 죄를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용서해 주옵소서”라 하지만, 행동으로는 여전히 죄 속에 살아갑니다. 입술의 회개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죄가 다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첫 단계는
죄를 드러내시고 다루시는 일입니다. 이 과정이 아프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자기 욕망의 정당화 도구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18장에서 이스라엘 왕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를 싫어했습니다. 미가야는 늘 그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하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곁에 두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입에 “속이는 영”이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 중에서
“나에게 유익하고 편한 말”만 들으려 할 때, 그것은 이미 속이는 영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의 자아를 부수고, 죄를 다루며, 십자가로 이끕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는 때로 아프고, 때로 억울하며, 때로 고독하지만, 그 길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적인 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부름받는 일입니다. 그 길은 광야의 길이고, 죄의 벽을 허무는 싸움이며, 때로는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그분의 마음을 아는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참된 자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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