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언어는 감정의 고양이나 즉각적인 행동 촉구로 이해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교하고 신중한 분별을 요구합니다. 그 핵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제,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어를 사용할 때 동사를 통해 시제를 구분합니다. “했다”, “한다”, “할 것이다”라는 차이는 행동의 시점과 방향을 결정합니다. 성령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성령의 시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현실 언어의 시제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사람은 쉽게 오해에 빠지고, 오해는 곧 잘못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과거형과 완료형은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뜻으로 성령의 음성 가운데 과거형이나 완료형으로 들려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이루었다.” “내가 너를 택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현재 상태에 대입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과거형을 사용하실 때, 그것은 시간의 과거라기보다는 확정성의 언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직 삶 속에서 실현되지 않았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결정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은 그를 “열국의 아비”라 부르셨습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언어는 이미 완료형이었습니다. 이 완료형을 자기 확신으로 오해하면 교만이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로 받으면 인내가 됩니다.
명령형은 내가 하라는 말인지,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말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즉시 결단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낍니다. 더 담대해지려고 애쓰고, 두려움을 몰아내려고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명령형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내라는 요구라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선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담대하라”는 말씀은 “지금 당장 담대해져라”가 아니라 “내가 너를 담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을 받은 이후, 그 사람의 삶에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담대함은 편안한 환경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과 도전 속에서, 스스로는 도망치고 싶을 때, 하나님께 붙들리며 조금씩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명령형 말씀은 즉각적인 행동 지침이 아니라, 앞으로 시작될 하나님의 작업에 대한 예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재형은 상황 설명인지, 약속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 가운데 현재형은 가장 오해되기 쉽습니다. “너는 이렇다.” “지금 이런 상태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사람은 쉽게 그것을 하나님의 평가나 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보신다”는 생각은 때로 큰 위로가 되지만, 동시에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형 서술은 종종 하나님의 마음이나 상황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지, 반드시 장차 이루어질 약속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과 우리의 삶을 곧바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많은 혼란을 낳습니다. 특히 이것이 소명이나 미래와 연결될 때, 사람은 스스로를 그 틀에 맞추려 애쓰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형 말씀은 행동보다 먼저 묵상과 성찰을 요구합니다.
미래형은 조건적 미래와 주권적 미래를 구분해야 합니다. “될 것이다”와 “되리라”는 비슷해 보이지만, 성령의 언어에서는 다릅니다. 대부분 우리가 듣는 미래형 말씀은 조건적 미래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회개와 기도로 삶이 연장된 것처럼, 우리의 반응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물게 하나님은 의지적 미래, 곧 반드시 이루어질 일을 선언하십니다. 이 경우에는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조건적 미래를 의지적 미래로 오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비전을 받았다는 이유로 결과를 확정해 버리면, 기다림과 순종 대신 조급함과 시험이 찾아옵니다.
이미지와 환상은 언어보다 더 깊은 언어입니다. 성령은 때로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말씀하십니다. 꿈과 환상은 상징의 언어이며, 한 장의 그림 안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듯, 전체 구도를 살피고 반복되는 상징과 중심 주제를 분별해야 합니다.
동양화가 사물 하나하나에 고정된 상징을 담고 있듯, 성령의 환상도 무작위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림으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놓치기 쉬운 전체를 단번에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성급히 단정하면, 오히려 왜곡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오해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즉각적인 징계를 받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 침묵을 허락으로 오해할 때, 우리는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기다림이며, 회개의 기회입니다.
성령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더 많은 음성을 듣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겸손해지는 훈련이며, 확신보다 분별을 선택하는 태도입니다. 시제를 분별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시간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음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듣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며,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앞에서 어떤 자세로 서 있느냐입니다. 성령의 언어는 우리를 높이기보다, 언제나 우리를 낮추는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 자리가 곧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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