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가난한 자의 오른편에 서서 그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편 109:31)
용감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흔히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용감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용기는 조금 다릅니다. 성경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하나로 꼽히는 다윗, 그는 맨손으로 사자와 곰을 때려잡고 골리앗 앞에서도 물매 하나만 들고 나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가장 두려웠던 순간에 한 일이 무엇이었냐 하면, 기도였습니다.
칼을 뽑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여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109편은 그 용기의 민낯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시편입니다.
다윗은 사랑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했고, 선으로 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랑으로 대한 사람들이 그를 저주했습니다. 그가 선으로 대한 이들이 악으로 갚았습니다. 시편 109편은 바로 그 상황에서 터져 나온 기도입니다.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분은 아실 겁니다. 그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말입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습니다. 설마 저 사람이 그랬을까 싶어서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분노가 밀려옵니다. 내가 얼마나 잘 대해줬는데 하면서 분노 뒤에는 허탈함이 옵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그 모든 감정이 식고 나서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차가운 한(恨)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서서히 망가뜨립니다. 다윗도 그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것을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대로 쏟아냈습니다.
시편 109편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정말 기도인가 싶을 만큼, 그 내용이 거칩니다. 다윗은 자신을 배신한 자를 향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의 날이 짧아지기를,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빼앗기를, 그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고 아내는 과부가 되기를, 그의 자손이 끊기기를 기도합니다. 읽다 보면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이것이 거룩한 시편에 수록된 기도란 말인가 싶습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십시오. 이 기도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배신당하고 저주받은 사람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직접 복수하는 것입니다. 무기를 들고 나가 그 원한을 자기 손으로 갚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한에 사무쳐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분노와 원망과 증오를 속에 삭이다가 결국 자기 자신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술로 달래고, 잠으로 피하고, 그러다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윗이 선택한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감정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저주처럼 보이는 이 기도는 사실 신뢰의 행위입니다. "하나님, 이 억울함을 당신께 가져갑니다. 제가 직접 갚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판단해 주십시오." 원한을 품고 혼자 부글부글 끓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 고발장을 제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저주 기도의 본질입니다.
어느 재판관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법원에 소장을 제출하는 사람은 아직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법을 믿기 때문에 법원을 찾아오는 것이다. 진짜 위험한 사람은 법원에도 안 오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다윗은 법원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재판관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의 법정에 자신의 억울함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인이라면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신을 당해도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라고 말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괜찮습니다"라고 미소 짓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그러한 초연함이 때로는 진짜 믿음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감정을 억누른 것이지 소화한 것이 아닙니다.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 다른 형태로 다시 올라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으로, 특정한 사람에 대한 과도한 거부반응으로,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감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분노를 분노라고 했고, 억울함을 억울함이라고 했으며,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복수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보기 좋지 않아도, 그것이 기도답지 않아 보여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했습니다.
사실 그것이 더 깊은 신뢰입니다. 예쁜 말만 골라서 드리는 기도는 어쩌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어려워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진짜 친한 사이에는 꾸미지 않습니다. 부모 앞에서 우는 아이는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에 웁니다. 남 앞에서는 참던 눈물도 엄마 앞에서는 쏟아지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다윗의 저주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깊은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믿었던 동업자에게 배신을 당해 사업이 무너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한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용서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저는 아직 용서가 안 됩니다. 그러니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용서가 된 다음에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가 안 된 그 마음을 들고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 용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저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기도입니다.
다윗도 완전히 용서한 상태에서 이 시편을 쓴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고, 여전히 그 원수가 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자체가 용기입니다. 어쨌든 기도하는 용기입니다.
시편 109편의 끝부분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저주의 언어가 가득하던 기도가 갑자기 고요해집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가난한 자의 오른편에 서사 그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오른편은 법정 용어입니다. 고대 법정에서 오른편에 서는 사람은 피고를 변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억울하게 고발당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내 변호인으로 서신다."
이 고백이 나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저주로 시작된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쏟아지는 동안, 다윗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변했습니다. 복수심이 신뢰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갚겠다는 결의가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가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기도는 우리가 이미 정리된 상태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자체가 우리를 정리시켜 줍니다. 엉킨 감정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그 감정을 풀어주십니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는 달라집니다.
삶에는 기도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너무 분해서, 너무 지쳐서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내가 지금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너무 형편없어 보여서 입을 열기가 망설여집니다. 원망 섞인 기도, 저주처럼 들리는 기도, 눈물만 나오는 기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기도, 이런 것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입을 다물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09편은 말합니다. 어쨌든 기도하라고 합니다. 형식이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용이 정제되어 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감정이 날 것 그대로여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형식을 따지시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신음소리까지 들으십니다.
보복하기 위해 무기를 드는 것, 혹은 억울함에 사무쳐 스스로 무너지는 것, 이것이 오히려 비겁한 일입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거나 아예 포기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신의 모든 억울함과 분노와 한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용기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오른편에 서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지금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한이 있습니까? 배신당한 기억이 있습니까? 억울하게 저주받은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고 싶은데 되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망설이고 있습니까?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다듬지 않아도 됩니다. 정리되지 않아도 됩니다. 저주처럼 들려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용기입니다. 가난한 자의 오른편에 서신 하나님이 당신의 변호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어쨌든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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