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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13편 -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3.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편 113:6)

어느 청년이 재수를 하던 그 해 겨울, 그는 고등부 후배 하나를 데리고 담임목사님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목적은 단순했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특별찬양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목사님께 제대로 된 대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냥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무언가 벅차서, 그 벅참을 소리로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거창한 사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해였고, 앞날은 불투명했으며,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했습니다. 이유를 설명하자니 도리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충만했습니다. 그 '
그냥'이 가장 순수한 찬양의 동기일지도 모릅니다.

시편 113편은 그 '
그냥'으로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 것이다"(1~3절, 새번역). 시편 기자는 왜 찬양해야 하는지를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찬양해야 하는지도 따로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시간의 경계도 없고 공간의 제한도 없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찬양은 그것 자체로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어느 음악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음악은
'왜 이 음이 여기 있는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음이 거기 있음으로써 스스로 말한다고 합니다. 찬양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를 논증한 다음에야 비로소 찬양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꽃이 왜 아름다운지 분석을 마친 후에야 눈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꽃은 이미 피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거기 계십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단지 감정의 유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4절부터 시인의 시선은 위를 향합니다.
"주님은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도다." 높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시인의 시선은 곧 아래로 내려옵니다. "주님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이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방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자기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앉게 하시는도다"(5~8절). 높이 계신 분이 낮아지십니다. 좌정하신 분이 몸을 굽히십니다. 이것이 찬양의 진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심만이 아니라, 그 높으심에서 내려오심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인도의 한 오지 마을에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인이었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며, 그가 가져온 복음은 그들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노인이 쓰러졌습니다. 선교사는 의사도 아니었지만 밤새 그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손을 잡고,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아무 말 없이 함께했습니다. 날이 밝자 노인은 눈을 떴고, 마을 사람들은 달라졌습니다. 높은 곳(외부에서 온 이방인)에서 내려와 진토 위에 함께 앉은 것이 말보다 먼저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시편 113편이 노래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편의 마지막은 놀라운 곳에서 끝납니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을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9절). 거름더미의 사람이 방백과 나란히 앉고, 자식 없어 수치 속에 살던 여인이 기쁨의 어미가 됩니다. 이 반전의 이야기야말로 찬양의 가장 오래된 뿌리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이, 낮은 곳의 사람을 높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노숙인 급식 단체에서 얼마 전 찬양대가 생겼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지휘를 맡으시고, 몇 분이 함께하지만 대원의 대부분은 노숙인들입니다. 어느 날 그들이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음정이 고르지 않았고 박자가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찬양에는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찬양이었습니다. 이유를 따지다가 나온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림을 받은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순수한 '
할렐루야'였습니다.

재수생 시절 담임목사님 사무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던 그 청년도, 그 소리를 알았습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온몸으로는 알고 있는 그 충만함, 찬양이 이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찬양 자체가 이유가 되는 그 자리입니다. 주님의 종들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찬양하라.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그냥, 찬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