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시편 114:2)
9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같은 지붕 아래서, 혹은 서로 다른 지붕 아래서, 형제는 형제를 피해 살았습니다. TV 화면 속 두 사람은 처음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서운함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말문을 여는 것 자체가 두려운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입대 날짜가 다가오자, 형이 먼저 사연을 보냈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두 사람은 서운했던 것들을 꺼내놓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 하나가 9년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무엇이 그 형을 움직였을까? 주변의 설득이나 방송 프로그램의 힘이 전부였을까? 아닙니다. 형을 일으킨 것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나는 그의 형이다." 소명감이었습니다. 형이라는 자리가 요구하는 책임감, 그리고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9년 동안 굳어 있던 마음이 그 소명 앞에서 녹아내린 것입니다.
시편 114편은 출애굽을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던 그 대장정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그 웅장한 서사 한가운데서 뜻밖의 고백을 꺼내놓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영토가 되었다." 온 백성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선언인데, 특별히 유다가 '성소'로 불립니다. 성소란 무엇입니까?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장소이자, 백성 전체를 위해 드려지는 제물이 놓이는 자리입니다. 유다가 바로 그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유다 지파는 특별한 위치를 가졌습니다. 다윗이 그 지파에서 나왔고, 예루살렘이 그 영토 안에 있었습니다. 통일왕국 시절, 유다는 얼마든지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실의 지파, 성전의 지파라는 자부심으로 다른 지파들 위에 군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기억하는 유다는 그런 유다가 아닙니다. 소명을 아는 유다입니다. 자신이 특권을 누리기 위해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섬기기 위해 바쳐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유다입니다.
이 시편이 불려진 배경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학자들은 이 시편이 바벨론 포로기를 전후로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고, 백성이 낯선 땅으로 끌려간 그 시절, 유다 사람들은 난민이었습니다. 기득권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은 다시 소명을 기억했습니다. 수난이 그들을 부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난이 그들을 원점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특권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고난의 자리에서 비로소 보였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 존재한다."
고통이 때로 사람을 되돌립니다.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 안의 파벌 싸움에 지쳐 사역을 떠나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건강이 무너져 6개월을 병상에서 보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왜 처음에 이 길을 택했는지를 다시 만났다고 했습니다. "저는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회복 후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수난이 소명을 되살린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분단의 시간에도 그런 약효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고 말합니다. 이 땅, 한반도 이야기입니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갈라져 있습니다. 7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산하를 나눠 가진 사람들이 총부리를 겨눈 채 살아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경계선은 지구상에서 가장 삼엄한 선으로 남아 있습니다. 9년 동안 말 한마디 없던 형제처럼, 수십 년을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며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런데 시편 114편이 묻습니다. 이 수난의 시간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습니까? 분단의 고통이 우리 안에 무언가를 일깨우고 있습니까? 혹시 이 긴 아픔이 우리로 하여금 원점을 묻게 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합니까?" 소명은 특권을 포기하게 합니다. 유다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성소가 되었듯, 진정한 화해는 누가 더 손해를 보느냐의 싸움을 멈추는 데서 시작됩니다. 형이 먼저 사연을 보낸 것처럼, 9년을 먼저 깬 것은 따지고 보면 형 쪽이었습니다. 유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소명입니다.
시편 114편은 출애굽이라는 과거 사건을 노래하지만, 그 안에 담긴 신학은 현재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갈라셨고, 강을 돌이키셨고, 바위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 일들을 행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의 분단도, 하나님 앞에서는 갈라진 홍해 하나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을 기다리는 수동성이 아닙니다. 소명을 기억하는 능동성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이 민족 안에서, 이 시대 안에서, 나는 어떤 자리를 위해 부름받았습니까? 그 물음 앞에 서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분단의 긴 밤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형은 9년 만에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소명이 그를 움직였습니다. 이 땅에도 그런 소명의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시편 기자와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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